타지살이

봉사로 확인한 인간의 이면

Rambling on & about 2020. 11. 27. 07:12

내가 성당 봉사를 하는 사람들의 이면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던 계기가 파푸아 뉴기니에 봉사를 갔었을 때인데 그때 정말 처음으로 본인의 우월감 채우기 수단으로 빈민 상대로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걸 느꼈음. 정말 그때 종교 시스템이 이러한 추잡한 사람들의 이면을 배양하게 도와준다는 것도 목격했지.

 

나 자신에게도 그런 모습이 어느정도 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말임.

 

정말이지 몇몇 참가자들은 심각한 나르시시스트 들이었는데 이들에게 이타심이란 일종의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에 필요한 수단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거야.

 

뉴질랜드 출신 어떤 한 여자 치과의사 애는 표정 관리며 말투며 그렇게 철두철미 해. 쉴 새 없이 웃는 표정을 짓고 모두에게 친절하며 흐트러짐 없는 그 아우라 자체가 나에게 이질감이 들 정도라고. 뭔가 평범한 사람 냄새 풍기지 말자는 자신만의 원칙 같은 게 있는 거 같았어. 마지막 날에는 그 많은 인원에게 밤새도록 손편지를 써서 다 전달을 해주고 뭐 고맙게야 느껴졌지만 왜 저렇게 까지 할까 싶은?

 

뭐 내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지. 나중에 얘가 무슨 뉴질랜드 의료팀 대표로 이번 봉사 체험에 대한 피드백을 도맡아서 작성을 하기로 했다네? 나는 이미 그 봉사 담당하던 감투 쓰기에 중독된 나르시시스트 아줌마에 한두 번 데인 게 아니라서 그다지 그 봉사 프로에 대해서 감상이 좋지 않았어.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는 것에 왜 그렇게 겉치레가 많고 일주일 머물면서 하는 봉사에 뭐 그런 대단한 성과가 보이겠어. 나는 정말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선 쓸게 많았지만 그 여자애한테는 그런 거까지 읊기는 싫었거든. 그래서 대답을 띄엄띄엄 했지.

 

그러니 나에게 ‘어라? 내 문자를 씹네? ㅎㅎ’라는 카톡을 날리더라고. 적지 않게 놀라긴 했어. 그때 참 쟤가 자기 유난을 떤 거에 비해서 내가 그리 협조적이지 않으니 얼마나 속상하겠나 싶었음. 그렇지만 어떡해. 손편지 쓴다고 유난 떤 것도 결국 지 자신이고 사람 밝은척 유난 떤것도 지 자신이고 보고서 도맡아 한다고 총대 맨 것도 지 자신이잖아. 내가 걔를 얼마나 알았다고 딱 일주일 남짓 아는 사이인데 걔가 지 몸 갈아서 나에게 손편지 하나 써줬다고 없는 말 지어낼 수는 없는 거고. 결론적으로 걔 자존감 채우는데 도움을 줄 필요가 없잖아. 그래서 바로 차단을 했지. 걔는 정말 자기 몸 갈아서 자기 돈 들여서 남에게 칭찬받으며 그러면서 자존감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애였던 거야. 생각을 해보니 봉사 끝나고 다들 술 마시고 그냥 풀어져서 잡담을 할 때는 코빼기를 안 비추더라고.

 

역시 사람 냄새 안 나는 애들은 나하고 상극이다. 이거 하나 깨우쳤지.

 

다른 아이 하나는 호주에서 나고 자란 치위생사 여자아이인데 뭐 치과의사다 의사다 직업 부심 부리는 아이들 중 단연 돋보이더군. 비의료 직업군인 여자애들 (주로 학교 교사들) 애들 모아 놓고 자기 직장에서 자기 활약상 레퍼토리만 끌어다 놓는데 귀 따가워서 남자애들 맥주 마시고 있는데 껴서 삐댔었어. 내가 무슨 이 멀리 타국에 내 귀한 연차 써서 와서 종일 노동하다 쉬는 이 시간까지 남의 직장 얘기 들어야 하나 싶었어. 외려 그냥 술이나 마시면 몰라.

 

걔는 결국 그 특유의 당당함과 입담으로 어린 대학생 애들까지 다 끌어들여 사랑방 수준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는데 살벌한 포트 모스비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어느 남자애에게 지금 요리사 아저씨가 가져온 짜장면 춘장 얼굴에 바르고 학교 담장 넘어가서 노닥거리면 너 남들이 현지인인 줄 알 거라고 그래서 칼은 안 맞을 거라고 하는 말에서 감지했지. 아 얘는 진짜 자기가 봉사하면서 만나는 파푸아 뉴기니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못 느끼는구나. 뭐 나라고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 못 봐주겠더라고.

 

나는 정말이지 그때만 해도 사람들 봉사를 가면 역지사지를 해야 하는 게 옳은 거고 주면 주되 받을걸 생각하면 그건 봉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몇몇 괄괄한 사람들한텐 그게 아니었던 거야. 자기가 결핍한 자존감을 봉사를 통해 채우려 하고 그걸 통해 자신은 남에게 적선하는 우월한 인물이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던 거였어. 그렇기에 마음에도 우러나지 않는데도 껍데기뿐인 이타적인 행동을 울며 겨자 먹기처럼 해야 하는 거고 그것에 상응하는 칭찬과 찬사를 받지 않으면 분노가 치미는 이런 계산식이 그땐 이해가 되지 않았지.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내가 지난 7년 동안 성당 생활을 한 것에 엄청난 회의가 들더라고. 나도 내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없는 시간 없는 체력 짜내서 저러고 다닌 건 아닐까? 얼마나 우스꽝 스러워 보여 이게?

 

그리고 한참 뒤에야 이런 봉사를 통해 우월감을 쫒는 형태의 나르시시스트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