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TSD 17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까지

나르시시스트의 자녀로 자라난다는 것은 생명이 도구화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형체화 시킬 수 없는 인간적 가치는 모두 다 지워지고 나르시시스트의 도구로 전락한다. 부모의 가치를 드높일 수 없다면 그 아이에겐 어떤 평화도 허락되지 않는다. 내가 엄마가 내뱉은 말과 표정으로 처음 들이마신 혐오의 잔재는 내 뇌리 속에서 깊숙이 똬리를 틀어 내 사고의 모든 것을 제어하게 되었다. 자기혐오와 자책이 내 성정의 핵심이 되어 버리는 것이 cptsd의 주된 증상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지속되는 행복과 만족감은 아예 없기에 그들에게 모든 긍정적인 감정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그 감정도 자신의 자식을 비웃음 거리로 만들어 느끼는 희열이었고. 그런 순간순간 이용당했던 것을 나이가 들어 되짚어 보니 내 삶의 목적이 무엇..

CPTSD 회복 2022.05.14

두려움의 진화

어려서부터 성취, 성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비슷한 무리들을 따돌려 안정권 위치에 도달해야 하지 못한다면 도태되어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였다. 평생을 시달리면서도 이해가 안 되었다. 일단 정신건강 관련 책에서 잘 이야기하는 주제도 아닌 데다가 이건 갓난아기 때부터 주입된 생각이라기엔 너무 사회화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이런 모양을 갖췄는지 써보려고 한다. 이것과 관련된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에 일어났다. 당시에 난 점수를 잘 받아왔다. 6년 내내 나는 90점대를 유지를 했는데 1, 2 학년 때는 100점도 줄 곧 잘 받아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 와중에 올백을 맞은 적도 있었으니 툭까 놓고 봐도 잘 하긴 잘했다. 내가 이런 아이의 엄마였다면 뷔페를 연달..

CPTSD 회복 2022.05.14

아픔은 자각 이후에 고통으로 변한다

페이스북부터 시작해서 블로그를 통해 내 삶에 대한 글을 끄적인 것도 어언 4년 정도가 되었다. 아무래도 CPTSD에 대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찬 글들로 보일까 봐 조심스럽기도 하다. 6년 전 본격적으로 다시 상담을 시작했을 때 난 내 속이 곪아 간 것이 내 탓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성정은 본디 이렇다. 그냥 살아있기에 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하는, 그게 나에게 있어 삶의 원동력이다. 어렸을 때부터 잦은 비교와 비난속에 시달리다 보니 그걸 내면화시키는 바람에 ‘채찍질’을 가장한 자기혐오에 평생 시달리긴 했지만. 난 이 나이가 되도록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 ‘내 아픔의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되물어 본 적이 없다. 내 삶이 항상 극..

CPTSD 회복 2022.01.24

CPTSD (Complex PTSD)란 무엇인가

Complex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란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도 불린다. 1992년도 주디스 허먼작 트라우마와 회복 ‘Trauma and Recovery’라는 책에서 처음 언급된 병명으로 DSM에 등재되어 있지는 않으나 WHO (세계 보건기구)의 ICD-11에 등재되어 있고 미국과 영국의 몇몇 보건 관련 기관에서 인정을 해주고 있는 질환이다. 주디스 허먼의 책에서 나오는 이 복합 외상의 키워드는 ‘지속되는 스트레스’이다. 아동 시기당한 지속적인 물리적, 정서적 학대나 방임/방치뿐만 아니라 전쟁 포로와 같은 수년간의 감금 생활, 납치나 감금을 통해 성노예로 전락하거나 노역을 하는 경우들이 있다. 짧은 기간이나 찰나의 사고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PTSD와는 스트레스의 ..

CPTSD 회복 2022.01.24

정서적으로 미숙한 엄마가 자식에게 씌우는 굴레

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3361236&page=21 내가 평생 속았던 말 ::: 82cook.com 자유게시판 철이 들면서부터 일만 있으면 자기 손가락을 펴서 짚어가면서 엄마가 한 말 “다섯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없다.” 그 말을 늙어 노쇠해서 흙으로 돌아간 뒤에서야, 내 나이 70가까워서 www.82cook.com 철이 들면서부터 일만 있으면 자기 손가락을 펴서 짚어가면서 엄마가 한 말 “다섯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그 말을 (그녀가) 늙어 노쇠해서 흙으로 돌아간 뒤에서야, 내 나이 70 가까워서야 가장 큰 편애의 표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깨물어 아픈 손가락 따로 있고 마음을 다친 상처로 피 흘리는 손가락을 보면서..

CPTSD 회복 2022.01.03

C-PTSD - 가해자인 부모에게서의 안전확보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한 작업은 진행 중인데도 새 엔트리를 작성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몇 주 전 정서적 재양육을 시작했는데 부모와 모든 재정적인 관계까지 다 청산을 하고 나고 1년이 지나서야 가능해졌다. 그만큼 내 정신이나 육체적인 면에서 트라우마 작업의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일정기간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한다. 주디스 허먼의 설명에 의하면 가정환경에서의 C-PTSD는 부모인 가해자가 자녀를 상대로 '독재자'로 군림하는 상황이다. 이런 강압적이고 폐쇄된 환경에 장기간 노출되어서 정서적인 감정 해소가 거의 불가능하고, 어린 나이 때부터 성격의 틀 자체가 변형되고 각종 신체적 증상 등등이 동반된다. Complex PTSD라는 새로운 병명을 창시한 주디스 허먼이 [트라우마] (영:Trau..

CPTSD 회복 2021.02.22

유기와 폐소에 대한 공포

10년 넘게 먹어오던 항우울제를 몇 주 동안 반으로 줄인 채 생활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자주 찾아오는 플래시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긴 시간 동안 감정이 격양되어 있고 신체적 반응도 꽤나 심하게 온다. 공황이라고 부르기엔 이제는 내 몸과 감정의 반응이 어떠한 계기로 인해 이런 패닉 상태에 빠지는지 잘 알기 때문에 요새는 그냥 플래쉬백이라고 일컫는다. 평생 살아오면서 축적된 트라우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상담 초기에는 원인도 알 수 없는 감정과 몸의 떨림 이런 것들을 버텨내느라 꽤나 힘들었다. 상담 2-3년 차 들었을 때는 성인 때 겪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서서히 떨쳐냈었는데 요즘에는 좀 더 어렸을 적 기억들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어찌 보면 내가 성인이 되어 트라우마로 기억하고 ..

CPTSD 회복 2021.01.19

질투라 칭했던 것들

과거에 내가 느꼈던 피해의식, 그 당시 내가 질투라고 뭉뚱그려 억제하려고 했었던 감정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중학교 시절 나는 같은 아이로부터 두 번을 따돌림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른에게 어떤 말도 못 하고, 전학도 못한 채 그렇게 중고등학교 과정을 주동자 아이와 그 무리들과 같이 마쳤다. 분노 그 시절 나는 분노라는 감정을 표출할 수 없었다. 일단 내 가정환경이 너무 좋지 않았다. 비자 상황으로 나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킬 수 없었고 돈에 대한 집착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엄마는 거의 공짜에 가까운 현재 학교에 나를 보내는 것만큼 더 나은 방도가 없었기에 가해자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를 해서라도 학교 생활을 내가 알아서 마무리지으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나에게 있어 내편을 들어줄 사..

CPTSD 회복 2020.12.24

따돌림이 사춘기 학생의 가치관에 미치는 영향 1

오랜 기간 동안 내가 극복했다고 믿었었던 학창 시절 은따의 영향이 서른 중반인 나이까지 그 마수를 뻗히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알게 되었다. 힘든 시기를 견뎌낸 것은 극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사춘기 때 따돌림을 당했던 경험은 나에게 있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거 말고도 남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는 것에 집착을 하는 습관까지 만들고 나르시시스트 엄마한테 이미 밟힌 내 자존감을 더더욱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첫 번째 따돌림 나는 호주에 오자 마자 들어간 랭귀지 스쿨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한국 아이들에게서 한 달 만에 은따를 당했다. 그냥 하루는 학교에 가니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걸고 말을 걸면 자리를 피했다. 랭귀지 스쿨에서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낀 후 나는 의..

CPTSD 회복 202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