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동안 내가 극복했다고 믿었었던 학창 시절 은따의 영향이 서른 중반인 나이까지 그 마수를 뻗히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알게 되었다. 힘든 시기를 견뎌낸 것은 극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사춘기 때 따돌림을 당했던 경험은 나에게 있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거 말고도 남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는 것에 집착을 하는 습관까지 만들고 나르시시스트 엄마한테 이미 밟힌 내 자존감을 더더욱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첫 번째 따돌림
나는 호주에 오자 마자 들어간 랭귀지 스쿨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한국 아이들에게서 한 달 만에 은따를 당했다. 그냥 하루는 학교에 가니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걸고 말을 걸면 자리를 피했다. 랭귀지 스쿨에서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낀 후 나는 의기소침해져 중국인 아이들과 대면대면 대화를 나눌 뿐 그렇게 홀로 학교 생활을 하다가 애를 쓴 덕분인지 7개월 만에 조기 졸업하고 한 학년을 꿇지 않은 채 하이 스쿨로 옮겼다.
랭귀지 스쿨을 마칠 시절 알게 된 사실은 나를 따돌렸던 한국인 그룹은 나랑 동갑이었던 어떤 여자애를 똑같은 방법으로 따돌렸고 걔가 나에게 건네준 쪽지에서 84년생 언니 K가 따돌림을 주동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 아이는 나에게 사죄하면서 자신도 손윗사람의 강압에 못 이겨서 나에게 못 할 짓을 했다 그러더라. 그나마 한국인 무리들에 대한 적개심이 주동자에게로만 좁혀질 수 있어서 속이 좀 후련했었던 기억이 있다.
이 일에 대해서 내 부모는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거쳐갈 학교인 데다가 자식의 친구 관계에 평생 도움은커녕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좋았던 나에게 있어선 학교가 순식간에 감옥 같은 곳이 되어버렸기에 그 감옥을 벗어나려 사투를 벌였다.
탈출과 새로운 시작
그렇게 나름 성공적으로 로컬 하이스쿨에 들어간 나는 당연히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를 할 수 없고, 애들 말을 반도 못 알아들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녹아들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학교를 처음 들어왔을 때 학교에서 나에게 매칭 해준 호주인 여자애 두 명이 있어서 그 애들과 어떻게 인연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당연히 안 되었다. 그 당시는 그 아이들이 금발 외모에다가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선택받은 아이들이라서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따라잡지 못하겠다는 그런 절망감이 있었지만 나이 든 지금에서야 이건 호주인의 습성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호주 학교의 문화는 한국 같지 않다. 한국 여자아이들은 친구의 개념을 짝꿍이나 삼총사의 개념으로 시작해서 다수의 그룹으로 확장해 나아가지만 호주에선 제일 작은 우정의 개념이 적어도 4-5명 이상이다. 한꺼번에 다수의 아이들과 비슷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외부인이 쉽게 들어오기도 힘들고 지리상 아이들이 그 동네 초등학교에서 고대로 그 지역 하이스쿨로 오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유치원 때부터 서로의 집 오며 가며 그렇게 깊이 지낸 아이들이 그렇게 무리를 지어서 있다. 게다가 98년 때까지만 해도 내가 다녔던 하이스쿨엔 영어 못 하는 동양인 나 하나였나 그랬다.
두 번째 따돌림
그렇게 98년 4학기를 마치고 99년 새 학기에 들어가니 전학생들이 들어왔는데 세상에 나를 은따 시킨 주동자 84년 여자 K가 내 학년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그때 느꼈던 충격은 참 컸던 거 같다. 내가 미친 듯이 영어 배워서 그 지옥 같은 랭귀지 스쿨을 도망쳐 나와서 이제 숨 좀 돌리고 새 마음 새 뜻으로 학창 시절을 시작하려고 하니까 왕따 가해자가, 그것도 시발 머릿 통은 무슨 액세서리로 달고 다니나 랭귀지 스쿨 시험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한 학년까지 꿇어서 들어오다니. 기껏 내 자리 만들어 보려고 일궈놓으니까 조폭 철거반이 워커로 짓밟고 침범한 느낌이었달까. 그 당시 나는 빠른 86년 생이었으니 같은 학급에 전학 온 K는 나보다 만 2살 위였다. 그러니 걔에 대한 경멸도 경멸이거니와 조소는 더더욱 컸다.
암튼 K 또한 외나무다리에서 원수 만난 거 마냥 좀 얼어붙는가 싶더니 나에게 와서 자기가 잘 못했고 자신도 남의 말에 휘둘려서 나를 따돌린 것이니 그렇게 미워하지만 말고 다시 친하게 지내보잔 식으로 알랑방귀를 뀌었다. 집안 어른한테서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13살 어린 나는 또 그 여자애를 다시 받아 주었고 한 3개월 지나 다른 주재원 부모를 둔 한국 아이, 이민 가정 한국 아이들이 서서히 학교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또 같은 방법으로 나를 따돌렸다. 그 애가 주동자라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무섭게 랭귀지 스쿨 때 내가 은따 당했던 방식이 같았는데 그 방식은 같은 출신인 K, 그리고 피해자였던 나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배신
같은 사람을 통해 2번 배신을 당하는 것 이것만으로 나에게 크나큰 악영향을 미쳤지만 이것을 더 극대화시킨 건 내 엄마였다. 그 당시 이모를 통해 넣었던 스폰서십 비자가 사기꾼 법무사가 날라버린 터라 공중으로 붕 떠버리는 바람에 학교를 옮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중요한 비자 문제를 이모한테 다 일임해버린 것도 너무나 부모 불찰이라고 생각한다. 왜 자기 신변의 문제를 다른 성인한테 맡기는지. 무식하고 비성숙한 부모들은 으레 다들 하는 짓이라지만.
게다가 엄마란 사람은 내가 학교를 다닌 이례로 나의 교우 관계, 학업에 일언반구도 없다가 갑자기 내가 같은 아이한테 2번째 왕따를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뭐가 갑자기 무서웠는지 자신이 그걸 무마를 하겠다며 나섰다. 그러고선 K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대뜸 하는 말이 '내 딸이 간혹 가다가 사람 기분을 긁는 말을 해서 서운함이 남았다면 내가 그 버릇을 고쳐놓겠다. 내 딸이 내일 학교 가서 정중히 사과를 할 테니까 부디 좋게 봐달라. 사과를 받으면 쫌 둘이 다시 잘 지내게 어떻게 도와주면 안 되겠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전화를 마치고선 '나에게 어떤 말실수를 했냐?' 대뜸 심문을 하길래, 나는 '걔네 집이 장사를 하니 그 집에 가면 서비스로 뭣도 얹어 줄 수 있냐?'라는 질문을 했다 하니 내 엄마는 나에게 길길이 날뛰면서 '네가 그렇게 친구한테 선 넘어가며 거지근성을 보이니 그런 거다. 무릎을 꿇어서라도 그 애와 그 애 엄마한테 가서 사과를 해라.' 하더라.
이게 나르시시스트가 하는 가스 라이팅이고 스케 입고 팅 (scape goating/힘없는 이를 제물로 삼아 본인은 빠져나오려는 수작)이다. 전후 사정을 보면 전혀 내가 사과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닌데, 내 부모의 불찰로 인해서 우리 가족 전체의 신변이 불 안전하고 이런 일로 주변에 큰 소문이 나면 안 되니까, 그리고 자식이자 3자인 내가 무릎 꿇고 빈다고 해서 엄마인 자신한테 자존심의 상처가 나는 건 아니니까 무조건 나에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감내하라면서 종용하고, 보호자로서 아이의 방패막이되어줄 책임에서 손을 떼는 것. 그렇게 나는 믿었던 엄마에게서 조차 애들이 상종안 하려고 드는 그런 막돼먹은 아이 낙인을 받았다.
이미 그렇게 왕따를 당했던 순간부터 상황은 끝이었다. 그 여자애랑 나랑은 다시 어떻게 원만한 해결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 애는 어쨌든 나를 지가 속한 그룹에서 끌어내서 자신의 영향력이 셈을 다른 아이들한테 과시하고 싶었던 거고 피해를 한번 당한 전력이 있던 내가 쉬운 타깃이었던 거다. 그렇지만 관심도 없고 머리도 안 좋은 내 엄마가 뭘 알겠나. 그냥 무조건 내가 빌면 그 이전처럼 돌아갈 거라고 믿은 것인지. 나는 사과를 해봤자 그 애랑 다시 붙어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한국애들이 나를 유령 취급하듯, 나도 그들을 유령 취급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아이에게 정말 안 좋은 가치관을 주입시킨다. 이들이 애들 앞에서 자주 하는 변명은 그냥 세상이 나에게 가혹했고 사람들이 본인을 무시하고 해치려 들며 그저 운이 더럽게 안 좋아 구질구질한 삶을 못 벗어난다는 그런 거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의 삶이 꼬이는 이유는 성인이면서도 이성적인 판단은 못 하고, 남에 대한 시기 질투가 그들의 삶의 동력인 탓에 삶에 대한 목표가 불확실한 데다가 자신의 주변을 노력으로 바꿀 생각은 안 하고 그저 잘난 자신이 원하는 만큼 못 미친다고 투덜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삶에 있어 어떻게 이성적인 사고로 옳은 선택들을 할까에 대한 지혜를 얻지 못하고 그저 미친 듯이 공부해서 학벌을 얻고, 노하우 없이 무식하게 일만 해서 돈을 얻고 아니면 몸뚱이를 무기로 삼아 가꿔 결혼으로 인생역전을 꿈꿔보던지 그렇게 뼈 빠지게 살면 삶이 행복해질 거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이게 나르시시스트 부모를 가진 피해 자녀들이 자주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다. 아이가 별 깊은 생각 없이 뼈 빠지게 일 하면서 그렇게 본인의 귀중한 인생을 갈아서 성공과 엿 바꿔 먹으면, 옆에 있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기가 노력 안 하고도 그 혜택을 다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은따로 인한 악영향 - 병적인 자기의식/PARANOIA
아무튼 불체자 신분으로 학교 생활을 이어가야 하니 전학은 꿈도 꿀 수 없으니 그렇게 한인 학생들한테 유령 취급을 받으면서 5년 안 되는 세월을 학교에서 버텼다. 그 사이에는 다른 아이들과 원만하게 친구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내가 당했던 그 말도 안 되는 처사는 그 5년간 하나도 해결이 된 게 없었다. 불상사를 만들 수 없으니 학교에 컴플레인을 걸 상황도 아니었고, 나를 왕따 시킨 K는 학교를 잘 만 다니며 그 세력을 확장을 시켜가고 있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내가 왜 그렇게 따돌림을 당해야 했었는지 그 이유도 못 들은 채, 어떤 사과도 못 들은 채 그렇게 버티기만 했던 것이다. 좀 있다가 이사를 간 후부터는 아침에 타는 버스에서부터 학교 수업 내내, 어쩔 땐 하굣길 버스에서 그렇게 은따 주동자랑 매번 마주치며 껄끄러움을 학교 생활 내내 느꼈다.
이 5년간을 같은 공간에서 은따 주동자를 수천번 마주치는 상황을 버티면서 나는 엄청나게 남의 의식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유 없는 은따를 나 머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나가 왜 은따를 당했을까 하면서 내 자신, 내 환경을 매일같이 되뇌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남을 의식하는 습관은 아무래도 피해의식 비슷한 것 아니었나 싶다. 아무래도 내 영역에 나를 2번이나 해한 사람을 두고도 마음이 편할 인간은 아무도 없을 거다. 게다가 어떠한 사과를 받는다거나 상대방이 개선의 여지를 주지 않았더라면 더더욱 그 가해자가 나에게 미치는 위협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를 마주칠 때마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채 그렇게 지내왔다.
은따로 인한 악영향 - 없는 문제를 나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내 안의 수치심
은따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는 습관은 내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를 뒀던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로부터 기가 잔뜩 죽어있었는 데다가, 내가 나이가 차고 그렇게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내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자식 편을 들면 본인이 다칠까 봐 겁을 먹어서는 상처 받은 나에게 도리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돌렸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인격장애를 가진 엄마는 나가 태어났을 때부터 나에게 무시, 하대, 질투, 분노들을 퍼부어대며 내 자존감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놨다고 봐야 한다. 사람의 불온한 습성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니.
어떤 어른도 나 얘기를 들어줄 리 없으며, 불체자 신분으로 어디에 가서 하소연을 하겠는가. 속앓이는 속앓이대로 하는 데다가 또 집요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라 왜 나가 그들한테 배척을 당했는지 답은 찾고 싶었다. 나는 워낙 내 자신의 가치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어 남의 평가에 휘둘리기 십상이었는데. 그 5년 동안 그저 귀가 얇던 나는 나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내 머릿속을 들여 보면, 보면 볼수록 나는 그 한국애들하고, 그리고 학교 내의 다른 호주애들하고 비빌 상대가 못 되었던 거다. 내 부모는 가방끈이 짧아 평생 일용직, 장사를 전전하면서 그렇게 구질구질 빚잔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를 했으니 돈을 뭉치로 들고 와서 사업을 사고 집을 사는 그런 투자이민 가정에 어찌 비할 때가 있으며 인텔리 부모를 둔 덕에 대기업 주재원 아니면 외교관 찬스로 여러 나라를 이미 거쳐온 애들한테는 영어로 공부하는 건 이미 일상생활이었던 거다. 호주애들은 뭐 이미 파란 눈에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거 자체만으로도 학교 생활에서 나보다 한 80은 먹고 들어가는 거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했었고 말이다. 이모집 창고에서 더부살이하던 시절이니 나이키 로고 박힌 운동화 한번 신어서 그 x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는 생각도 나오더라도 도로 들어갔다. 내 환경은 미성년자인 내가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공부를 해도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는 나의 학업 성적에 대한 후려치기가 심했다) 이미 어렵다는 한국 커리큘럼까지 다 꿰고 있어 호주 학교 들어오자마자 수학 시간에서 1등 먹는 한국애들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생각에 자괴감. 돈은 돈대로 없으니 플레밍턴 마켓에서 짭 후디 하나도 엄마한테 구걸해서 사는 형편이니 비싼 걸로 치장해서 그들과 동급이 되는 건 상상도 못 하고. 워낙 그 당시 큰 바위 얼굴이란 콘셉트가 한국 넷에서 부흥할 때였는데 나를 따 시킨 여자애 중에 한 명이 과체중인 k 말고 나한테 얼굴이 크다고 얘기를 내뱉은 건, 내 비율이 워낙 구리다는 얘기가 아닐까. 학교에서 할 건 공부밖에 없으니 공부는 열심히 하겠다만, 그래도 뭣같이 생긴 안경잡이 주재원 자식이 나보고 얼굴 크다고 한건 진짜 현시점에서 고쳐야 되는 문제로 여겨졌다. 그렇게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2-3년간 섭식장애를 앓았다.
사람들이 나를 배척한데 있어서 결국 나에게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했고 걔네들이 나를 다시 안 받아주더라도, 나에게 있는 하자들은 고쳐나가야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다. 뭐 지혜로운 말을 해줄 어른도 없으니 내 하자는 가난하고 불안정한 환경 그리고 내 껍데기에 있는데 환경은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몸매라도 어찌해보자 라는 생각에 거식증을 키우게 되었다.
왕따의 원인
은따가 일어나는 이유는 당연히 가해자 본인의 니즈 충족 때문이다. 그리고 인격장애인들이 끼어있는 환경은 정상적이고 안정적일 수가 없다. 그룹에서 본인의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 따위는 안 중에도 없는 데다가 , 특히나 폐쇄적인 학교 같은 환경에서 남에게 위협을 가했을 때 도리어 그 가해자 주위 사람들이 가해자를 중심으로 더 강하게 집결되기 때문이다. K 같은 애는 습관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걸 보아 인격적으로 큰 하자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데다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그룹 내에서 아무런 역할이 없는 것 자체를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룹 내에 분열이라도 일으켜서 본인의 가치, 힘을 확인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고 그 분열을 일으킬 때마다 제일 약한 애들을 떨궈내고 남들에게서 분리시키는 거 아닌가 싶다.
당연히 은따가 일어나는 이유는 피해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지만 엄마의 양육이 나를 적합한 타깃으로 만들어 놓긴 했다. 내 엄마는 워낙 아이의 성취를 평가절하하고 자존심을 짓밟아서라도 본인이 더 돋보이는 행동을 자주 했다. 초등학교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간 것을 본인이 학교에 촌지를 찔러줘서 엄마 아니면 네가 뭔들 하겠냐라고 떠벌려댔지만 그해에 나는 5학년 나이에 워드 자격증 필기에 붙었다 (학교 촌지 없어도 성취가 가능하다는 얘기) 게다가 나에겐 8천 원 학습 만화책 사주는 것도 부들부들 대면서 내가 전교 부회장이 되니 엄마의 본인 이름으로 학교 도서관에 백과사전 2세트 (2백만 원 돈 했던 걸로 기억한다) 기증하러 간다면서 수여식 가며 우쭐댄다던가.
그렇기에 사춘기 시작 무렵에 나는 이미 기가 죽어있고, 남의 심기 거스르지 않으려고 거절이나 싫은 소리 못하고, 자기주장도 거의 없으며,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이런 아이가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학교 생활을 하면 당연히 타깃이 될 수밖에. 본능적으로 인격장애 가지고 있는 애들은 나 같은 사람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자기주장 없는 사람만큼 자기 손에서 주무르기 쉬운 애들이 없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서 찾아오는 플래시백
세월이 흘러 나를 따돌렸던 애들과 나의 인생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비록 졸업까지 가는데 큰 문제들이 있었지만 학벌도 쌓였고, 나름 커리어 목표라는 게 생기니 그들을 더 이상 의식하면서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것 만으로도 나는 극복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내가 당했던 따돌림, 엄마가 했던 처사들에 대한 해답을 나이 30이 되어서 들었고 5년 회복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학창 시절의 상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왕따 가해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을 의식하고, 근본적으로 나와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갭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좁혀질 수가 없는 거 같고, 그로 인해 조바심 그리고 기약 없는 노력을 그래도 해나가야 한다는 절망감에 매번 휩싸인다.
지옥 같던 전 직장에서 나름 괜찮게 이직을 했다고 나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가던 시점, 전 직장에서 나보다 경력 짧은 나르시시스트 애가 내 직장으로, 그것도 나랑 같은 직함을 달고 왔다는 소식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은 나로 인해 지금 1주일 넘게 플래시백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이 상황이 내가 과거 랭귀지 스쿨에서 탈출한 후 하이스쿨에 적응하려는 찰나에 은따 가해 자애가 내 학교로 전학을 따라서 온 그 상황과 많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내가 싸하다 생각해서 말도 섞지 않았고, 나르시시스트 특유의 시기심으로 친분도 없는 나에게도 간혹 가다 말로 쨉을 날리기 일 수였던 여자애인데. 수능 점수며 대학 네임 부심 부리는 그런 한국 꼰머스러운 짓은 안 하려고 한다. 여기는 대학 졸업 자체가 헬이기 때문에 수능 잘 본건 별 성과도 아니더라. 그렇지만 그냥 본질적으로 봤을 때 수능 좋게 봐서 석사까지 마쳤고 화이트 칼라 직종 경험만 도합 12년인 내가, 카운슬에서 9년 콜센터 하다가 나이 차니 성인 전형으로 대학교 졸업해서 이제야 좀 꼬인 인생 풀어보려고 하는 애한테 무슨 시기 질투심을 느끼겠나.
사람한테 질투를 느끼면 플래시백도 안 생긴다. 플래시백은 백 퍼센트 위협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 나르시시스트 여자애를 가까이하면 나에게 해를 가할, 그 은따 가해자랑 엄청 비슷한 부류의 사람으로 인식을 했었기에 직장을 벗어나서 그런 인간들을 이제 마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한숨을 돌리고 있었던 거다. 하나 그 위협이 다시 내 영역으로 너무 쉽게 발을 들여놓는 상황에 나는 좌절을 했고 거기서 아직까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쌩 3일을 그 플래시백이 어디서 온 건지 조차도 모르고 넋 나간채로 생활을 했는데 금요일 상담 후로 그 원인을 파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직도 그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이 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그 플래시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 생각, 감정 같은걸 정리를 하고 있는 건데 사실 주말에 그 당시 트라우마들을 본격적으로 나 머릿속에서 내 스스로 재생을 하면서 grieving을 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런 프로세스를 하면서 과거에 나에게 했던 말들은 다음과 같다.
- 그때 너의 편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 너의 부모조차도 너에게 방어막이 되어주기는 커녕, 본인의 잘못을 덮기 위해서 너를 제물로 삼았지.
- 괜찮은 부모였다면, 너에게 이미 '한번 배신 때린 애는 버려라. 걔는 죽어도 그 버릇 못 고친다.'라는 조언을 이미 해서 두 번째 문제까진 막지 않았을까.
- 아니지, 괜찮은 부모였다면 너를 남들 앞에서 자기주장 원만하게 내세우고, 남들 앞에 기 안 죽게 집에서 독려해주는 그런 사람들이었을 꺼고, 이미 너의 친구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을 거야. 그만큼 너의 안위에 관심이 많아야 하는 게 부모의 일이니까.
- 그런 애들하고 너는 너무 달랐어. 그렇게 당하고도 너는 더 나아지기 위해서 노력에 노력을 했잖아. 남들과 출발선이 너무나 뒤처져 있고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너와 남들 사이의 갭을 줄이는 것도 모자라서 너무 많은걸 일궈냈잖아. 남들과 다르다는 게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니야.
- 너는 너만의 세상이 있고 너만의 삶이 있어 그것의 가치는 너 자신이 주관하는 거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 삶의 성과물, 그들의 세상 속의 것들이 부럽다고 해서 너의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부정당하는 느낌은 너의 엄마에게서 비롯된 쓸모없는 감정들이란다. 남들이 보여주는 것에 그렇게 휘둘려서 너 자신의 가치마저 흐릿하게 만들지 마. 그건 네가 흘렸던 피와 땀을 슬프게 하는 일들이야.
- 살아가면서 네가 온전한 정신으로, 너의 한도 안에서 인생의 선택을 현명하게 계속해나가는 것만큼 행복하고 성공한 삶 또한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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