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TSD 회복

지난날의 과오를 받아들이며

Rambling on & about 2020. 12. 10. 14:45

지난 몇 주간은 참 많이 힘들기도 했고 다시금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주에 내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가 나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써 내려가면서 나에게 해를 가했던 아이들에 대한 복수심과 분노가 나의 삶의 동력이자 이유였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성공이 복수의 방법이라는 그릇된 믿음 그리고 가해자들에게 성공을 허락하고 싶지 않은 마음.

 

가해자들은 나를 따돌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상황은 종료되었고, 가해자들도 피해자인 나 자신도 서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하지만 어리고 힘없던 내 관점에선 그렇게 흐지부지 상황이 종료가 됐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가해자들이 엄벌을 받는 그런 교과서에서 말하던 정의가 구현되어야 상황이 비로소 종료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6년이란 학창 시절이 흘러가는 그 사이에도 나는 따돌림을 당했던 그 시점, 그때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과거 속에 박제된 가해자들을 상대로 혼자서 섀도복싱을 한 것이다.

 

이 와중에 그 어느 누구도 나를 구제해줄 수 없다는 걸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던 건 그나마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내가 만약 사는 데 있어 조금이나마 요행을 바랐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거 같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의 손을 빌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내손으로 일군 성공만이 그 가해자들을 상대로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 믿었다. 하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내 외부 환경은 내가 내 손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조차도 줄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성취의 연속에서도 병적인 패배의식과 비관에 휩싸였다. 

 

과거의 내 삶은 복수를 위한 삶이었다. 이미 나 조차도 그 가해자들이 별 볼 일 없는 인생 그저 그렇게 뻔하게 살아갈걸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삶에 있어서 좋은걸 얻는 거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았던 거다. 이분법적으로 인성이 나쁜 아이들은 지들이 벌인 일에 대한 대가만 줄곧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길 원했던 건 순전히 내 욕심이자 내 스스로 그 억울함을 달래지 못해서 상상해낸 이상적인 세상이기도 했다. 살아가면서 느낀거지만 카르마며 인과응보는 일어나지 않더라. 성격이 팔자라서 지 인생을 스스로 꼬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공권력이 행사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 마다 벌을 다 받지는 않는다.

 

지금에서야 그냥 돌아보며 '내가 왜 그렇게 가해자들을 과하게 의식하면서, 내 자신을 몰아가면서 살아갔을까. 별것도 아닌 존재들인데.'라는 생각도 세월이 그들에게 벌을 주고 나 자신이 잘 되었으니 인과응보가 존재한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존재들때문에 내 인생의 많은 일부를 괴로움 속에 뒹굴며 허비한 것에 대한 씁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 사건에서 내가 겪었던 억울함은 가해자에게 퍼부으면서 풀어 봤었자 어떠한 득도 없었을꺼기에 내 주변에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 온기 속에서 차츰차츰 풀어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자식인 내가 상처 받아 시름시름 앓는 것을 보면서도 내 잘못이라면서 몰아세우고, 2차 가해를 하면서 내 아픔을 철저히 무시한 나의 가족에 더 분개할 따름이다. 

 

세상에 적은 무수히도 많아

 

세상에 나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들은 무수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살아나갈 수 있는 건 적어도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만큼은 나는 내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받고 재충전할 수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나 나에겐 태어나서부터 그런 게 허락되지 않았고, 집이나 밖이나 험난한 정글이기에 삶이 유난히도 살기 힘들었다. 

 

중고등학교뿐만인가? 내 복수심은 이후에 성인이 되어서도 꺼질 줄을 몰랐다. 어찌 보면 나는 내 인생의 20년을 그냥 주체할 수 없는 분노, 복수심, 적개심을 나쁜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잘 되게 용인하는 불합리적인 세상을 향해 겨누면서 살아왔다. 내편을 들어줄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사람 가득한 세상 속은 그렇게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쉬웠을 텐데. 내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런 세상을 계속 살아가다가는 제3의 따돌림, 제4의 배신 이런 식으로 나에게 대미지가 가해질 때마다 나는 이전처럼 그렇게 무너져내려 결국엔 다시 일어설 수 없으리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학교 시절 가해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들은 직장, 대학, 성당 등 도처에 널려있었고 이들과 깊이 엮이면 또다시 '잃어버린 6년'이 다시 시작될까 봐 그들 곁에만 가면 온 신경이 곤두서는 데다가 그저 말없이 그들이 지들 방식으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금 세상에 불합리성에 대한 불만만 커져갔다. 

 

나 자신은 그렇게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던가?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꽤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이 살려고 노력을 했다고 생각했고 나르시시스트나 인격장애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을 적어도 단죄할 만큼의 자리에 있다고 스스로 착각했다. 내 과거 때문에 세상과 특정 성향을 보이는 부류에 대해 개인적으로 악한 감정을 항상 지니고 살았다는 건 까맣게 잊은채 말이다.

 

이미 나는 20대 중반에 우울증을 심히 겪고 나서 인터넷 악플러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어느 포스팅에서 적은 적 있다. 하지만 그 '이해'라는 개념은 그들이 살아가면서 느낀 지속적인 좌절감에 의해 정신력이 무너지는걸 내가 체험했기에 어느 정도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들이 특정 트라우마에 의해서 세상의 '특정 부분'에 대한 분노를 키워 간다는 점은 미쳐 내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내현적 나르시시즘을 동반한 외톨이 살인마 (lone wolf)들의 삶을 살펴보다 보면 이들은 본인의 개인적인 인생사에서 트라우마나 환경을 통해 사랑을 받아야 하는 주체(부모)로 부터 외면을 당하는 바람에 유난히 거절을 당할 때마다 분노가 폭발적으로 높아져 결국 묻지 마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꽤나 많다. 미국의 인셀 살인마들이 대게 그런 부류인데 그들은 자신은 초인의 수준으로 특별하지만 세상이 그것을 몰라준다는 망상에 빠져있다. 그들에게 여자 친구라는 존재는 자기가 그저 손짓만 한 번만 해도 자신에게 반해서 저절로 넘어와야 한다는 그런 기대심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삶은 거진 불가능에 가까운데도 이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걸 받아들이면 자신이 초인이라는 망상 자체도 폐기를 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의 텅빈 자아를 지탱하는 유일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상이 그들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그걸 자신들을 거절한 여자들 탓을 하면서 그렇게 묻지 마 살인 같은 범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분노가 내 삶에서 발현되었던 과정은 저 과정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당연히 나는 남을 물리적으로 해쳐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는 그런 병적인 질투는 가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해를 끼칠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순탄한 삶이 이어지며 어느 면에서는 나보다도 더 좋은 스펙과 부를 쌓는걸 '허락'할 수 없었다. 내 상상 속 세상에선 이런 건 용납이 안 되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결국 한 낱 미물인 인간에게 타인의 팔자를 뒤락 펴락 할 만한 능력이 어떻게 주어질 꺼라 착각을 했었을까? 내 분노가 어떻게 어마어마했길래 나는 내게 신의 능력이 생기길 바랬던 걸까. 

 

이런 그릇된 바람으로 인해, 나르시시스트들이 삶을 아주 '잘' 살아가는 걸 볼 때마다 난 이것들을 내 에고에 가해지는 상처 (narcissistic injury), 또는 세상이 나에게 하는 도발로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불필요하게 아파하고 좌절하고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그들이 잘 산다고 해서 내 삶이 비참해질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하긴 나르시시스트였던 엄마는 자신이 시기하는 상대가 잘 되면 자신의 삶은 나락에 떨어진다는 믿음에 분노가 더 불타오르긴 하더라. 그녀는 자신의 라이벌을 정말 파괴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더 나아갈 수록 자신의 비참한 인생과 상대방의 인생의 갭이 더 벌어질 수록 추월을 할 가능성도 낮아진다는 걸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걸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자랐으니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갔단 이유 하나 만으로써 현재에 끼칠 힘이 더 이상 없다. 같은 맥락으로 과거의 안 좋았던 감정은 내 머리에 어떻게 깊게 새겨졌던 말던 현재 내 결정들을 흔들만 한 어떠한 정당성이 없는 것이다. 내 삶이 한 발짝씩 과거에서 멀어질 때마다 과거의 감정 또한 내 삶을 장악할 힘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과거 속 억울함을 그만 놓아버리지 못해 내 현실은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가도 내 마음은 그때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내가 원했던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과거의 분노가 뒤틀려 만들어낸 망상이었고,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상의 적들 또한 내 상상에서 만들어낸 허구였고 실제로는 내 삶에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들이었으며, 나는 감정에 휘둘려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는 여느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았던 거다. 평등이며 정의며 도덕이며 다 내가 내 맘속에 지닌 그 분노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콘셉트에 지나지 않았던가. 

 

분명 과거에 내가 당했던 일은 타인들에게서 많은 동정을 얻을만한 그런 트라우마이긴 하다. 하나 이 시기부터 수년간 쌓아간 내 분노가 내 사고관에 미친 영향과 그 과정은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만한 일이고 이건 이 포스팅을 통해 인정하고 나름의 흑역사이자 과오라고 특정 짓고 넘어가고 싶다. 

 

이번이 깨달음을 통해 나는 이 고통스럽던 굴레에서 이제 발을 내디뎌 벗어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분노와 적개심의 족쇄로 인해 미래의 내 삶이 저당 잡히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에서 힘이 없듯 과거의 감정 또한 현재의 삶에 끼칠 힘이 더 약해졌으면 하고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