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먹어오던 항우울제를 몇 주 동안 반으로 줄인 채 생활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자주 찾아오는 플래시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긴 시간 동안 감정이 격양되어 있고 신체적 반응도 꽤나 심하게 온다.
공황이라고 부르기엔 이제는 내 몸과 감정의 반응이 어떠한 계기로 인해 이런 패닉 상태에 빠지는지 잘 알기 때문에 요새는 그냥 플래쉬백이라고 일컫는다. 평생 살아오면서 축적된 트라우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상담 초기에는 원인도 알 수 없는 감정과 몸의 떨림 이런 것들을 버텨내느라 꽤나 힘들었다. 상담 2-3년 차 들었을 때는 성인 때 겪었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서서히 떨쳐냈었는데 요즘에는 좀 더 어렸을 적 기억들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어찌 보면 내가 성인이 되어 트라우마로 기억하고 있었던 건 그 당시에 불행에 어릴 시절 트라우마의 기억이 오버랩이 되면서 그 내적 파괴력이 증폭이 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인이 사건도 그렇고 아동학대와 유기에 대한 한국 언론의 관심이 한창 커지는 시기이다. 피어 보지도 못하고 한만 가득한 짧은 삶을 마감한 어린 정인이에게 큰 애도를 표한다. 이 와중에 이목을 끈 '내복 아이' 사건이 내 어린 시절 큰 상처와 연관이 있어 이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 그 아이와 어머니의 사정은 그들만의 것이니 이 사건과 내 얘기를 연관 지을 생각은 없다. 그냥 표면적으로 내가 어렸을 적 겪었던 사건과 비슷할 뿐이라 생각한다.
어렸을 시절 내 엄마는 장사를 하면서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결혼을 했으니 남들 앞에서 빠지지는 않게 살아야 한단 그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고 싶어 했다. 여기서 남들 앞에서 빠지지 않게는 살아야 한다는 건, 남들 앞에서 뒤처진 것처럼 보이지 않게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결혼 생활 유지하면서 그렇게 고정관념 속 가정의 모습은 유지를 해야 한다는 게 목표였다. 어찌 보면 돈을 버는 것이 그녀에겐 가장 일 순위였고 가장 수고가 많이 드는 일이었을 거다. 가정의 평화란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웬만하면 남들이 그 집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턱이 없고 이혼 서류에 도장만 찍지 않으면 온전한 가족의 이미지는 어느 정도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전혀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내 엄마에게 있어 가족은 그 껍데기 만으로도 순기능을 한다고 생각했다.
유기에 대한 기억들
내가 가진 제일 어린 시절 유기에 대한 기억은 내가 3-4살 때쯤 대로변에 빨가벗은 채로 나와 엄마를 부르짖으면서 자지러지게 울었던 기억인데 이는 나중에 엄마를 통해 구전으로 재구성한 것이라 온전한 기억이라고 보기 힘들다. 엄마는 어렸을 때 내가 얼마나 문제아였는지 계속 쪽을 주기 위해 이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 여자 말에 의하면 새벽 7시 전쯤에 아이가 일어나 보니 집에 아무도 없어서 두려운 나머지 엄마를 부르면서 뛰어다니다가 차가 다니는 대로변까지 나왔는데 마침 옆집 아줌마가 소스라치게 놀라 나를 데려와서 엄마인 본인한테 인계를 해줬다는 얘기이다. 이때 엄마는 새벽시장에 물건을 하러 나가야 해서 아이를 그냥 재워놓고 새벽 1-2시에 나가서 그날 아침 8시가 되어 왔다는 얘기가 되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 서양권인 호주에서는 아동학대로 신고 들어갈 감이긴 하다. 그때 아빠가 집에 있었다면 애가 자는걸 뻔히 보고도 새벽에 출근을 했고 문단속도 제대로 안 하고 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것도 제정신 가진 사람이 할 짓은 아니다.
이 외에도 엄마가 나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지껄여대던 어린 나를 키우면서 힘들었던 에피소드들을 보면 본인이 육아를 해서 힘든 이야기 보단 남들이 나를 돌봤을 때 일어났던 일들이 많다. 교회 다니는 이웃이 어린 나를 맡아주겠다 흔쾌히 약속을 해서 그리했더니 그 아줌마가 나를 인질(?)로 삼아서 교회 부흥회에 참여한 후 아이를 찾아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얘기라던가, 생후 몇 개월이 안 되어서 인큐베이터 신세를 진적이 있었는데 이때는 서울 상경 처음이었던 내 외할머니가 나를 둘러업고 응급실로 가는 바람에 가능했다는 거, 옆 가게에서 신세를 지다가 그 집 소파를 라이터 빵을 냈었다거나 말이다. 이처럼 아이한테 눈떼고 사는게 일상이었던지라 유치원 때는 가게 앞에서 큰 교통사고도 당했었고 당구장 손님이 가게 앞 빌딩으로 끌고 가 성추행도 했었다. 방임이 학대와 그 결이 같다는 건 그냥 내 어린 시절을 봐도 수긍이 갈지도 모른다.
뇌리에 강하게 남겨진 유기와 폐소의 기억
5-6살에 교통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하고 퇴원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 가까이 갈 엄두가 안 났다. 그 이전까지는 유치원 하교를 하고 스스로 엄마의 가게까지 걸어갔었다. 퇴원 후에는 내가 울며불며 격렬하게 반응을 해서 이게 아예 불가능하니 아이를 가게에 데려오는 게 귀찮아 결국 아이를 반지하 단칸방에 홀로 두고 본인은 가게를 끝내고 밤 8-9시가 되어 돌아오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울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옥탑방을 낀 갈색 2-3층 다가구 주택이 그 시절 내가 살던 곳과 제일 비슷하다. 내 집은 그런 건물의 지하층에 있었고 연립이나 아파트 같이 제대로 된 철제문을 가진 것이 아니라서 갈색 새시에 위아래로 불투명한 유리로 된 대문에 안전장치라고는 바깥에서 채우는 무거운 자물쇠 정도였다. 집에는 변기가 없어서 큰일을 볼 때는 공동 화장실로 갔었는데 빌딩을 삥 둘러서 반대편으로 가야 했었기에 대소변 참는 게 일종의 버릇이 되었다.
이 집에서 있던 유기와 폐소에 대한 기억이 뇌와 몸에 동시에 각인된 최초의 기억이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집에 홀로 남겨져 있었는데 그때는 왠지 밖에 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 같다. 아마도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그 문에 있는 조그마한 핸들을 돌렸는데 문이 안 열리는 것이다. 십 수 번을 돌리고 문을 밖으로 밀고하다가 방에 있는 조그마한 환풍 창을 통해서 나가보려고 화장대에 올라섰지만 창문이 방범창인 데다가 낮은 화장대를 디디고 차마 올라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렇게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이곳에 묶인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문 앞에서 자지러지게 울다가 거의 사투를 벌이는 순간 휘두른 발길질로 집 문의 유리를 깨부수었다. 이렇게 큰 소란을 피우다 보니 결국엔 주변의 이웃, 응급 구조대 같은 사람들이 와서 내 발목을 타월 같은 걸로 감싸고 그랬던 기억이 있고 엄마도 나중에 왔던 거 같다.
그때 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난 특이하게 이 시절 부모에 대한 기대 자체가 없었다. 이런 형편없는 사람들이 내 부모 일리가 없다고 매일 부정을 하는 탓에 언젠가는 내 진짜 부모가 와서 나를 데려가 주겠지, 아니면 이 형편없는 이들이 나를 더 온전한 사람들에게 입양시켜줬으면 하는 판타지로 하루하루 버텼다. 단칸방에서 이런 사람들과 한 이불을 덮고, 마주 보고 먹고 잔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어린 나이였으니 가난하게 사는 것이 뭐 이렇다 할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사는 환경이 협소해서 고통스럽기보단, 내가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숨 쉬는 생물이라는 것 자체도 망각한 체 나를 떼어버리지 못하는 혹, 유령 취급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비참하고 슬펐다. 부모에게 기대어서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같은 연유로 하지 못했다.
국민학교 입학 후에 결국 아이에게 관심하나 주는 것도 인색한 이 매정한 인간들이 내 부모임을 받아들여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현실과 타협을 하게 된 것도 아마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부터였던 거 같다. 부모에 대한 환멸은 항상 있었지만 이런 걸 표출해봤자 소득이 없고 가혹한 냉대만 돌아올 것을 알기에 그냥 내색하지 않았다. 엄마에겐 어느 불만이나 투정도 하지 않았고 그냥 착한 아이라면 부모에게 할 법한 '나중에 잘 되어서 길러주신 은혜를 갚겠습니다' 같은 고리타분한 문구의 글들을 어버이날마다 쓰게 되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가슴도 머릿속도 다 메말라 갔다.
반지하집에서 그 탈출을 위한 사투를 벌였을 당시에도 교통사고로 바깥세상이 정글 숲보다도 더 무서워 보이는 나에게 차로 하나 혼자 못 건너냐며 면박을 주는 엄마가 진짜 엄마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내 부모는 설마 내 친 부모의 부탁을 받고 나를 임시 위탁해주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판타지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언젠가는 이 가정, 이 집을 벗어나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나에게 주어질 거라고 그 희망으로 버텨갔던 와중에 이런 일이 터졌던 거다.
그래서 반지하 방에서 내가 이리 갇혀있더라도, 혹여나 죽게 되더라도 이 '가짜 엄마'는 눈 깜짝하지 않을 거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이 여자는 내 생사에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을 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홀로 갇혀 죽게 된다면 환상 속 '진짜 부모'에게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은 영영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싶다. 굳이 나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생명줄인 엄마가 나를 유기를 했다는 것에 단순하게 분노를 했다기보다는 '엄마 같지도 않은 엄마 행세를 하는 년'이 결국엔 나에게 하나 남은 새 삶을 향한 유일한 희망을 앗아가는구나. 나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런 여자가 결국 나에게 애정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박에 면박을 주고 방치를 일삼다가 나를 죽음으로 까지 몰아가는구나. 이런 분노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 당시를 떠올리니 뚜렷이 올라오는 분노는 제대로 된 부모 역할도 못하는 것들이 결국 나를 죽음으로 몰아간다라는 생각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결을 같이 하는 분노와 공포는 십수 년 이후에도 내 삶 속에서 계속 반복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엄마가 약을 과복용하는 탓에 결핵을 앓아 신분이 발각되어 추방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을 때, 20대 중반 결국 불법체류가 발각되어 둘이 추방되어 우울증을 앓던 나 혼자 덩그러니 그들의 비즈니스며 집 처분을 다 도맡았어야 했을 때, 그리고 나이 스물아홉에 이틀을 밤낮으로 꺼이꺼이 울다가 결국 집을 나와 부모와 연을 끊었을 때도 같은 분노가 항상 치밀어 올랐다.
"왜 나는 평생 제대로 된 보살핌도 받아 보지 못한 서러움 하나 만으로도 삶을 살아가는 게 휘청거리는데 저 둘을 부모로 둔 죄 하나 만으로 어른 혼자도 감당 못할 고통을 항상 어린 나이에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하나."
어찌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그 어린 나이에 본능적으로 이런 부모는 나에게 어떠한 보호나 방어벽을 제공하지 못할 거란 걸 알아차렸다니. 이후에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고 내 부모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수십 년 내 삶을 뒤돌아 보니 결국 그들이 나에게 부모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 삶에 위협을 제공했다는 건 의심할 수 없는 팩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씁쓸하다. 친부모라는 존재가 버젓이 있었기에 그들이 부모 노릇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가면 놀이만 하고 있는 허구의 존재라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데 이렇게 먼 세월이 걸렸다는 게.
"나에겐 온전한 부모의 존재가 아예 없었다.
도리어 불온전한 어른들이 삶의 책임을 회피하려는데서 생기는 폐해를 영문도 모른 채 감당하는 것이 내 몫이었을 뿐.
나에겐 부모가 없었다. 내 삶에 위협만 가하는 이들은 나에게 있어 백해무익한 존재일 뿐이다. "
그러고 보면 저 반지하 사건은 나에게 있어 집이란 공간을 소름 끼치게 만드는, 언젠가는 벗어나야 하는 그런 곳으로 각인을 시키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집에 있는 것 자체가 내 숨통을 조여왔고, 그 불안을 떨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집안일을 하면서 내 몸을 혹사시키지 않으면 잠에 들지 못했다. 이런 삶을 오랫동안 반복하게 된 것도 저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부모의 무관심으로 집에서 혼자 갇혀 죽거나, 아니면 위협이 도사리는 밖에서 사고로 죽음을 맞이 하거나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만 세상을 경험하 어린 나에게 있어서 세상 그 어느 곳도 나에게 안식을 줄 만한 곳이 없었다. 평생 어느 곳을 가서도 불안을 느꼈고 집이 집 같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보금자리에 대한 애착도 없었고 그저 몸이 축나면 몸져누울 곳을 집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거 같다.
그때 내 몸은 어떤 걸 느꼈나
이 플래쉬백이 요즘 들어서 매일 같이 찾아오는데 이 시절에 느낀 내 극한 공포는 아직도 신체 감각으로 남아있다. 손과 발이 마치 땅으로 밑으로 빨려 들어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느낌,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은 물론이고, 상체에 힘이 빠져서 당장 몸이 바닥으로 꼬꾸라질 거 같은 느낌, 손과 팔이 져려오고 심하게 떨리게 된다. 반지하 단칸방 사건의 영향 때문인지 나는 일차적으로 이렇게 불안이 올라오면 나도 모르게 무조건 바깥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밖에 나가면 그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기에 온몸이 목석같이 굳어 버리는 그런 느낌에선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을 벗어나 거리나 쇼핑센터를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내 20대 생활 그 자체였다.
반지하 집 사건이 났던 시기 나는 한 2년 남짓 되는 짧은 시기에 덤프트럭에 치여 거의 죽을 뻔한 사고, 집에서 홀로 생활하면서 고립된 생활, 사물을 부시는 그런 격한 부부싸움을 자주 목격하였으며, 반지하 셋방에서 갇혀서 몇 시간을 헤매는 이런 사건 등 전반적으로 신체적으로 센 강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었다. 당연히 가정환경이 내가 좀 더 컸다고 해서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에 내 몸이 버텨내야 할 스트레스는 대여섯 살 아이가 쉽게 감당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가 플래시백이 올라올 때마다 내가 느끼는 신체적 감각이 한 가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 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축적되어 온 트라우마들이 한순간에 신체적 감각의 오작동으로 동시에 연결되는 게 아닐까 싶다. 단칸방 사건 이전부터 나는 이미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자동차, 도로에 대한 극심한 불안증이 있었기에 단칸방 사건은 이미 붙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라고 본다.
신체적 문제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이긴 하다. 내가 그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받아들였는지 대강 짐작을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불안과 동시에 올라오는 감각의 오작동은 그 원인(들)도 다 파악이 불가능한 데다가 어떤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전혀 파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체의 감각과 같이 오는 플래시백은 게다가 오래가면 일주일 넘게 지속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일상생활에 패턴이 당연히 꼬일 수밖에 없다. 자택 근무를 하고 있는터라 어떻게 시간 분배를 할 수 있다 쳐도 이런 플래시백이 올라올 때마다 마치 3-4일이 영원히 내 삶에서 지워져 버리는 듯한 박탈감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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