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3

삶의 의미

일전에 삶의 목적에 대한 생각을 하던 중 결국 다른 무수한 글들과 비슷한 종점에 도달한 적이 있다. 생명의 탄생이란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의 출생에 있어선 어떠한 목적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점. 출생에 대한 명분은 생명을 잉태하는 이에게는 존재할 수 있으나 ‘출생을 당하는’ 어린 생명의 입장에선 어떠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생도 그저 자연의 섭리에 따른 해프닝 (incident)에 지나지 않는다.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선생님이 내 생각을 지배하는 삶의 테마는 무엇이라 정의를 해준적이 있는데 이때 들었던 말은 “너는 세상을 즐길 권리가 없다.”라는 문장이었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지나치게 자기 절제적이고 금욕적이며 자기 혐오로 인한 분노를 자해에 가까운 기행으로 나 자신에게 표출하는..

CPTSD 회복 2020.11.27

효와 인간의 오만

한국 토착화 유교에서 나오는 효에 대해선 정말이지 원색적인 비난을 참을 수가 없다. 본론적으로 이 콘셉트를 내가 극혐 하는 이유는 인간 중심적인 오만함 때문이다. 사람도 다른 동물에 비해 다를꺼 하나 없는 생물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 한들 여타 다른 생물들처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부모로서 아이를 가지는 것조차 자연의 도리를 거스를 수 없다. 특히나 헬조선 유교 사상에 물들어 있는 한국 부모들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본인들이 아이를 마치 조물주가 빚어 내듯 창조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나에게 있어 최고의 극혐 포인트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아이를 ‘창조’하거나 ‘빚어 낼’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태교를 해서 아이의 외관을 바꿀 수 있을 거라 기대를 거는 이들의 무지는 이미 ..

CPTSD 회복 2020.11.25

이방인의 설움 vs 인간으로써의 세상과와 괴리

내가 오랫동안 이민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생활의 녹록지 않음, 인종차별, 새로운 환경에 적응과정에 그렇게 세세하게 적지 않는 본질적인 이유는 나는 이민자로서의 이방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이방인이란 느낌을 내가 말을 떼기 시작했을 때부터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순탄한 유년시절을 겪고 그에 인한 높은 자존감으로 원만한 교우 생활 (크게 왕따를 당한건 아니지만 절친한 친구들을 사귀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음)까지 했더라면 한 순간에 호주땅에 떨어져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인종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거 자체가 아주 크나큰 쇼크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내 블로그의 글은 나의 호주 적응기로 도배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것 자체에 엄청난 프라이드를 가졌을지도 모르고 "OO의..

타지살이 2020.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