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삶의 목적에 대한 생각을 하던 중 결국 다른 무수한 글들과 비슷한 종점에 도달한 적이 있다. 생명의 탄생이란 관점에서 봤을 때 인간의 출생에 있어선 어떠한 목적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점. 출생에 대한 명분은 생명을 잉태하는 이에게는 존재할 수 있으나 ‘출생을 당하는’ 어린 생명의 입장에선 어떠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생도 그저 자연의 섭리에 따른 해프닝 (incident)에 지나지 않는다.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선생님이 내 생각을 지배하는 삶의 테마는 무엇이라 정의를 해준적이 있는데 이때 들었던 말은 “너는 세상을 즐길 권리가 없다.”라는 문장이었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지나치게 자기 절제적이고 금욕적이며 자기 혐오로 인한 분노를 자해에 가까운 기행으로 나 자신에게 표출하는 과거의 모습을 보아도 이 문장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나 그 문장을 들었을 때 뭔가 나를 관통하는, 정곡을 찌른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다.
자신의 욕구 분출을 언제나 우선권으로 두고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 자체가 불가능한 엄마를 둔다면 뭐든지 엄마의 케어가 필요한 어린 아이로썬 당연히 자연스레 엄마의 그림자 속에 살아야 한다. 그렇게 엄마에게 모든 우선권을 줘야 하는 위치에 있다면 내 삶을 쥐락펴락하는 보호자에게 순종해야 하고 아이로써 온당히 요구할 수 있는 보호라는 권리마저 어떠한 박탈에 대한 분노 표출 없이 그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때 왜 내 안에서 요동치는 무언가가 없었다를 짚어보면 권리를 아예 가져 본 적이 없으니 권리를 잃어버린 슬픔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박탈을 당한다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도 몰랐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살면서 내 10대와 20대를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아무것도 없더라라는걸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 공허함을 온몸으로 맞았을 때 그 허탈함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처럼 나에게 인생자체가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느냐 또한 그저 그냥 내가 태어난 환경에서 “해프닝”처럼 생겨났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극단의 양가감정을 야기한다. 그냥 운 안 좋게 그런 환경에서 그런 무심하다 못해 잔혹한 부모 밑에 태어난 해프닝으로 그 의미가 정해졌다는 게 한편으로는 허탈하기도 하고 “삶을 즐길 권리가 없다”라는 걸 이마에 새기고 태어나는 아이가 어디 있겠냐는 생각에 앞으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주문에 남은 인생을 홀려 살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든다.
Demon 이란 단어의 시초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를 따라다니는 정령에서 비롯된다. 현 시대에서 악마라고 알려진 단어의 원조는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수호 정령인 것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본인에겐 어떤 정령이 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를 내었고 이로 하여금 내 행동에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내면화된 목소리, 즉 무의식 속 내 생각을 제어하고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삶의 의미”라고 볼 수 있겠다.
나에겐 삶의 의미가 이러이러 하고 나는 이러이러 한 사람이 되길 희망하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맞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 이걸 관철하는 주된 테마는 출생 후 초반 몇 년에 “해프닝”처럼 생긴다는 것이다. 갓난아이들이 어떠한 포부를 자각하면서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두뇌의 발달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해프닝처럼 생긴 동생의 탄생(자신에게 주어질 관심이 다른 아이에게 집중됨을 의미 함.), 부모의 성향, 성격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행들, 아이 본인에게 일어나는 부득이 한 병치레 등등 이런 무수하고 예측 불허한 일들이 내면화된 목소리를 내 삶을 따라다닌다는 것은 우연치 곤 참으로 누구에겐 불행이고 누구에겐 다행히 되는 걸 지도 모르겠다. 주로 내면화된 목소리에 휘둘리면 그다지 좋은 경험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에게 있어 내면화 된 목소리는 중세시대 때 변이 된 demon이란 단어처럼 타락한 천사의 속삭임과도 같았다. 버젓이 잘한 것도 완벽하지 않으니 찢어 버리고 다시 하라는 불안감, 아무리 열심히 해도 타인을 기쁘게 해주지 못할 거라며 단언을 한다던지, 세상에 너를 도와줄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조금만 삐끗해도 너는 세상에서 영영 낙오된 존재가 될 것이란 이런 불길한 느낌들 말이다. 해프닝에서 비롯된 생각의 테마치곤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형벌이라고 밖에 안 느껴진다.
허나 이렇게 매사 내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마다 다 관여를 하는 이 내면화된 목소리가 애초에 그렇게 나에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 또한 너무 어린 나이에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아서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 자체를 어떻게 따지지 못했기에 그랬지 않았을까 싶다.
이로 인해 내 머릿속에 자리잡아 그 끔찍한 정령 또한 남의 눈을 빌려서 볼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걸 보면 참 자신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인간의 한계란 이렇게 보잘것없다는 생각에 또 허망하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남의 힘이라도 도움을 받아야겠단 생각에 내면화된 목소리를 내친 그 의지 또한 내 삶을 윤택하게 해주려 한 고마운 정령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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