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TSD 회복

나르시시스트가 자녀에게 하는 학대

Rambling on & about 2020. 11. 27. 07:21

요새 상담을 하면서 새로이 머릿속에 각인되는 단어 조합이 있다.

 

바로 나르시시스트적 학대이다.

 

바로 나르시시스트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만으로도 학대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전까지는 자존감이 없다 못해 자기혐오가 있다 보니 정서적 학대라는 콘셉트 자체가 너무나 생소하게 들렸다. 육체적인 학대야 신문이며 텔레비전을 통해 파다하게 알려진다지만. 자녀 몸에 손을 한 번도 안 대고도 학대를 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뭔가 나가 소통을 함에 있어 잘못 전달하고 오해의 소지를 제공했기에 나르시시스트들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합리화를 하면서 나 자신에 탓을 돌린 셈이다.

 

게다가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르시시스트들에게 그들의 가족이나 애인들이 고통받는 이유는 그들의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고 그것을 뒤따르는 무관심이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했었다. 아예 관심을 주지 않고 방치해두는 것과 상대방을 따라다니면서 집요하게 괴롭히는 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르시시스트적인 학대가 방관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니 정서적 학대의 선상에 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 삶에 너무나도 극명하게 엄마는 나를 피를 말려 죽일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는 기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기억을 살려내지 못한 거다.

 

나는 분명히 나르시시스트적 학대의 피해자이다. 엄마는 매 한번 들지 않았지만 엄마는 마치 나를 파블로프의 개처럼 “고전적 조건 형성”을 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무의식적으로 나오는거라 의도적은 아니었다. 엄마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나를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방관을 하기도 했지만 딱 그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나를 질투했다. 나르시시스트적 학대의 중심에는 질투라는 것이 존재한다. 질투가 병적이면 사람은 집요해지고 정말 사람을 피를 말려 죽일 때까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한다. 이것이 고문이고 학대 아닌가. 그 질투에 계속 노출되면서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엄마가 뿜어 내는 그 질투에 계속 나를 방어하는 법을 익힌 거다.

 

유아기 아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며 자라면서 보호자가 해주는 보살핌으로 인해 얻는 감정들이 어느 것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유대 관계로 인한 안정감일 수도 있고 불쾌감 해소도 있겠고 그리고 즐거움을 배운다. “놀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부모의 보살핌 아래에서 실컷 할 수 있는 자격을 자동으로 획득하겠지. 나는 부모의 사랑하는 자식이니까 말이다.

 

근데 나는 그 놀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아주 어린 나이부터 차단당했다. 내가 기억하기도 훨씬 이전부터 엄마는 경제 부흥에 이제 먹고살만해졌다는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자기의 자식을 보면서 전쟁 후 몇 년 있다 태어난 자신과 너무나 극명히 대비됨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엄마는 어렸을 적 부모에게 수도 없이 당한 서러움을 끌어안고 살며 그 분노를 다른 이들에게 퍼부었다. 없이 사는 집에 태어난 죄로 고작 8살 나이에 자신의 어린 동생을 업어 키워야 했다. 나를 키우면서 궁핍한 집안에서 어린아이의 몸으로 떠맡아야 했던 육아의 끔찍함이 머리에 아주 생생히 각인됐을 것이다. 갓난아이인 내가 자지러지게 울어댈 때마다 그 과거의 끔찍한 경험이 되살아 났을 거고 그녀 자체의 인격이 정상 궤도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는 갑갑함 뿐만이 아니라 분노 같은 것에 휩싸였을 것이다.

 

내 엄마의 입장에선 어린아이인 내가 아이로써 누리는 것들이 자신의 유년 시절에 비해선 터무니없이 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기억나는 유치원 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내가 원해서 가진 놀잇감이니 옷이니 이런것이 마땅히 없었다. 아동복 장사를 하는 엄마가 들여오는 물건을 하루 입다가 엄마가 그걸 다시 세탁을 해서 파는 식으로 옷을 입었기에 옷장에 딱히 내 꼬까옷이라고 하며 애지중지하며 아낄만한 옷이 없었고 장난감 또한 이모나 삼촌이 선물해주지 않는 이상 엄마가 아는 주스 대리점을 하는 집 아들 둘의 남자애들 장난감을 얻어서 노는 바람에 맨날 조립 방식 책자가 없는 레고 꾸러미를 들고 씨름을 했었다. 아이가 별 흥미도 못 느낄 방판 동화책 세트는 그 ‘없는’ 살림에 할부로 해주었지만 놀만한 장난감은 한 번도 엄마가 제 돈을 주고 사준적이 없다. 솔직히 이 부분까지는 그냥 엄마가 무심한 거 아니냐, 질투가 어디 있냐 할 것이다. 나도 딱 이 부분까지만 기억이 났으니까 말이다.

 

엄마의 질투가 어린 나에게 향했던 때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었을 거다. 호주에서 살던 이모가 사촌 동생 두 명을 잠시 데려온 적이 있다. 그때 내 큰 사촌 남동생은 아주 어린 나이에 닌텐도 게임보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마냥 신기해 보였다. 내 또래 남자아이들도 애지중지 해서 선생님한테 뺏길까 봐 학교에 잘 안 들고 오는 게임보이를 고작 6살 된 아이가 들고 다닌다는 게 엄청나게 컬쳐쇼크였달까. 평생 게임 콘솔 근처에도 안 가본 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 때문인지 엄마도 그 게임보이에 눈독을 들였다. 이때 엄마의 나이는 40 초반이었다. 어른이 게임을 하는 게 유치하다는 게 아니다. 11살 아이와 40대 초반의 어른을 놓고 볼 때 누구에게 게임기가 더 절실하겠는가?

 

근데 엄마는 자기가 항상 더 절실했다. 그래서 자기 자식인 나를 견제를 했다. 게임기 하나를 가지고 말이다. 항상 돈타령을 해대며 자신의 삶이 팍팍하다면서 6살 된 아이도 가지고 있는 게임보이를 제 돈을 주고 살만한 형편은 안 되었나 보다. 그래서 사촌이 잘 때 마다 그걸 항상 붙잡고 있었다. 애들이 이모와 함께 나들이를 가기라도 하면 그 게임기를 일부러 숨겨놨다가 가게에 가지고 와서 하더라. 게다가 내가 만약에 그걸 가지고 노는 상황이 오면 계속 내 주위를 맴돌면서 내가 얼른 죽기만을 기다렸다. 운 좋게 슈퍼마리오 단계를 깨고 길게 게임을 하더라도 내 주위에서 어물쩡 거리면서 무언의 압박을 주는 엄마가 항상 눈에 거슬린다. 그래서 게임을 하면서도 맘이 편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기가 못 참으면 분노를 뿜어대면서 게임기를 내 손에서 낚아채가겠지..”라는 생각에 놀면서 즐거워야 할 시간이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시간인 거 같았다. 그래서 한판만 한판만~ 그렇게 칭얼대면서 시간을 벌 수도 있었는데도 내가 알아서 대중 죽고 게임기를 엄마에게 자진납세를 했다.

 

이는 한 1-2년 후 우리가 호주로 이민을 가서도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 내 사촌은 학교에 가게 되었고 일도 안 하고 집에 있던 엄마는 내 사촌 게임기에 무한정 손을 댈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때는 랭귀지 스쿨 등록 이전이라 마냥 엄마가 집안일하면서 그렇게 게임기 들고 시간 때우는걸 마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개월 동안 엄마는 사촌이 가지고 있는 아케이드 게임을 두서너 개 다 끝냈지만 나는 어깨너머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지도 솔직히 잘 모른다. 아직도 난 닌텐도 마리오 같은 아케이드 게임 할랑치면 가슴이 미칠 듯 뛰고 공포심에 몇 분 못하다가 결국 내려놓는다.

 

이때는 사촌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게임보이를 차지하면 엄마는 그 꼬맹이에게 애 처럼 칭얼거리면서 파워 레인저 테이프를 틀어 줄 테니 게임기를 자기한테 주어라 온갖 애교를 떨었고 사촌이 몇 레벨까지 깼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12살 내 눈엔 이게 우스운 수준이 아니라 섬뜩했다. 저게 나였다면 나를 저렇게 붙잡고 게임기를 뱉어 낼 때까지 온갖 수를 다 쓸 텐데. '차라리 게임보이 주인이 아니니 다행이다. 게임하겠다고 욕심만 안 부리면 저런 더러운 꼴은 안 당하고 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게임을 안 한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게임을 아예 안 한건 아니다. 그런데 집에서 엄마 눈 앞에서는 못하겠더라. 한국에 살던 시절 난 컴퓨터학원에 밤늦게까지 숨어서 학원 컴퓨터를 잡고 게임을 할 수는 있어도 엄마 가게에 딸린 방에 설치되어 있는 내 컴퓨터에선 차마 게임을 못했다. 엄마는 가게 전화 못 받으니까 나보고 인터넷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꼭 컴퓨터는 가게 안에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자기가 할부로 큰돈 주고 산 거니 내가 어떻게 이걸 사용하나 감시해야겠다는 거다. 그래서 그 비싼 컴퓨터를 얼마 사용도 못했다. 엄마가 주던 눈치 때문이다.

 

이런 때에 엄마가 나에게 항상 하던 잔소리는 그냥 여느 일반 가정에서 애들이 들을 법한 잔소리였다. ‘집에 일찍 와라. 학원 열심히 다녀라. 숙제 좀 바로 해라…등등’ 하나 일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정말 원도 한도 없이 기분 찢어지게 놀고 그게 너무 심하니까 엄마가 집에 들어오라 재촉을 하는 것이고 나무라는 것이지 나 같은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아예 없던 거나 마찬가지이다. 되리어 부모가 나가서 놀라고 부추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른이 애한테 하는 잔소리가 다 애 잘되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애 입장에서 그게 맞는 말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안 그러면 사람 흉내 내는 내 엄마 같은 앵무새 밖에 안 되는 거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엄마는 끝끝내 나를 사람 파블로프의 개로 만들었다. 놀려고 하면 겁부터 나고, 자투리 시간이 나면 뭔가 생산적인 일부터 하려고 들고, 휴가를 내면 일주일도 못 견뎌 지옥 같은 느낌이 들고, 놀이를 즐길 줄 몰라 나가서 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식당에 처박혀서 친구들이랑 술 마시는 것뿐. 엄마에겐 내가 즐거움을 느끼고 놀면서 행복한 것이 사치라고 느꼈기에 의도를 안 했든 간에 나를 보며 느꼈던 그 형언할 수 없는 분노 (외동딸로 좋은 시대에 태어난 나에 대한 질투)에 대한 목적을 달성한 거다. 그 개 같은 짓거리로 인해 나는 33년 삶 동안 뭘 하나 100퍼센트 즐거움을 만끽하며 놀아 본 적이 없으며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사고도 즐겨본 적이 없고 숨겨두기에만 급급하고 그렇게 지옥 속에 고립되면서 살았다. 자기 자신도 계획하지 않은 그 무의식 속의 질투 덕에 나 또한 그걸 다시 부셔버리려고 혼돈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게 정서적 학대가 아니고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