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면서 겪었던 고통은 다 사람들에 의해 생긴 거라고 봐도 무관하다 본다.
살면서 내가 유난히 힘들었을 시절 내가 둘러싸여 있던 사람들에 대한 재평가를 이제야 완전히 하게 된 거 같다. 그 시절에는 놓치고 있었던 디테일 같은 것들이 십수 년이 지난 이제야 다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엄마는 내성적이고 생각 많은 내 성격을 나약하고 쓸모없는 모습이라 늘 비난을 했었고 생각이 짧고 배움을 두려워하는 본인은 늘 주눅들은 나향형 나르시시스트로써 나름 설움이 많이 쌓였는지 나를 대외적으로 늠름하고 당당하면서도 남의 매력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적절한 수동적인 모습이 있는 나르시시스트가 되길 희망했다.
평생을 내 자신의 본래 기질을 부정당하고 살았기에 나는 엄마와 훗날엔 이모까지 합세해서 나의 기죽은 모습을 비난하는 것에 더 겁을 먹은 나머지 평생을 비난을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며 살게 되었고 삶에 대한 방향 따윈 없었으며 삶의 어디에서도 노력을 통한 보람, 만족감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내 가족이 나를 향해 날리는 날카로운 표창을 피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사춘기 올라가는 시절엔 더부살이하면서 동시에 3명의 나르시시스트들에게 노출이 되었으니 말이다. 찰나의 위험만을 피하는 사람에게는 공을 들여 탑을 쌓을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노력해서 무엇을 일구고 탑을 쌓아 그걸 보며 뿌듯함을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는 호주에서 첫 학교 생활중 한국인 아이들에게 하루아침에 은따를 당했고 우연히 일어난 이 일을 통해 나중에 내가 가정에서 받은 멸시와 비난들이 바깥 세상에서도 통용되는 나에 대한 사실적 모습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이는 나가 훗날 내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고방식의 큰 기반이 되었다.
랭귀지 스쿨에서 은따를 처음 당했을 적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학교 건물 뒤켠에 햇빛이 잘 들지 않은 풀밭에 앉아서 철장 넘어 보이는 하이스쿨 학생들을 보며 “만약 내가 이곳을 벗어나 하이스쿨에 가게 된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하이스쿨에 들어갔지만 그런 뭔가 달라질꺼란 장밋빛 판타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담장 밖을 벗어나 보니 더 큰 구덩이었을 뿐이었다. 기존 호주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과 허물없이 놀기엔 나 자신이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결론을 지어버리고 그들을 만나서였는지 가뜩이나 말도 안 통하는 순간에서 그냥 포기부터 해버리기가 너무 쉬웠다. 그 와중에 나를 은따시켰던 주범이 내 학교로 다시 전학을 왔고 거기서도 슬슬 한국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하자마자 다시 은따를 당했다. 같은 일이 계속 반복이 되는 데다가 엄마는 나에게 잘못을 돌리지.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름 합리화뿐이었는데 그게 바로 ‘나는 평생을 살아도 주류에 편입을 못하고 낙오자로 언저리에 맴돌며 살아갈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었다.
비자가 꼬여서 전학을 마음대로 갈 형편도 아니었고 전학을 시켜달라고 해봤자 귀찮아하며 성가시게 굴지 말라는 쪼로 나에게 달려들 엄마가 눈앞에 아른거려 그 학교에서 5년을 버텼다. 당연히 나를 무시하고 말 상대도 안 해주던 한국애들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정말로 어느 서클에서도 융합이 안 되는 소위 겉도는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랭귀지 스쿨은 그나마 미친 듯이 공부해서 빨리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었지만 하이스쿨은 졸업까지 버티는 것 밖엔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대학에 가면 뭔가 나아지겠지 라는 희망을 그나마 잡고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중간에 나는 이미 섭식장애등을 겪으면서 몸도 마음도 바닥을 찍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 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을 거라는 일종의 신호를 몇 번 읽은 적이 있었다. 하이스쿨에는 정말 온갖 인간 군상이 있었기에 그나마 학교 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카오스 속에서 발란스를 찾아가면서 살았고 뒤늦게 친분을 쌓은 아이들도 이심전심하는 게 있었기 때문에 친한 친구들에게 나중에 상처를 받는 일은 거진 없었다.
문제는 대학이었다. 경험에 의해 답습한 내 일종의 편견이 있다. 이는 어느 특정 직업군은 유난히 나르시시스트들이 많이 모인다는 것이다. 웅장하고 비범한 큰뜻을 염두에 두고 혁신을 통해 창조를 하는 직종 중에 깊은 생각과 통찰력으로 무장을 안 해도 추상적인 단어 놀음이나 표현 기법으로 어떻게든 자신이 어느 레벨에 올라갈 때까지 꾸며낼 수 있는 사람들이 몰리고 활개 치는 직종 – 영어로는 fake it til you make it이라고 한다. 이걸 다 충족시키는 필드가 건축 디자인 계열이라고 본다. 내 편견을 응집한 계열의 직종이 부동산, 자동차 세일즈 등이긴 하지만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서 되돌아보니 내 첫 전공 분야는 정말이지 나르시시스트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학급은 전반적으로 개개인이 나르시시스트들이 아니더라도 그런 성향에 취해있었다고 본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르시시스트들에 얼굴에는 비범함 내지 오만함이 있었고 남에게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철옹성 같은 경계를 하면서도 다른 아이들에게는 제압을 하려는 말투를 즐겨 쓰고 할아버지대 내지 아버지를 뒤이어 건축을 한다는 핏줄에 대한 자부심 과시부터 자신은 유독 기발한 아이디어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때문에 전혀 학교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가 자신에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그런 여유로움. 누가 보기에도 미완인 작품이거나 디자인 자체가 허술한 작품을 강사 앞에서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발표하며 강사가 핵심적인 문제를 꼬집어도 되리어 그건 별 대수롭지 않은 문제이다라며 본질을 흐리는 화법이라던지.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어떠한 보강이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을 한다거나 하는 모습 말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매번 보면서 나는 나름 달관을 했던 거 같다. 디자인이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 평가인 데다가 실험으로 결과를 입증하거나 주입식 공부로 시험을 치러서 결과가 나오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저런 행동과 화법이 어느 정도 과제의 점수에 큰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선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라는 결론을 내렸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그들처럼 할 수 없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했고 말이다. 그들 속에 융화가 되지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은 마치 고등학교 때 내가 느낀 “나는 주류로 편입이 불가능한 부류의 사람이구나.”라는 생각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했고 말이다.
아직도 나는 대학 때서부터 이어지는 친한 친구가 없다. 전공을 선택한 이후로도 한 번도 그 환경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고 친해지기엔 너무나 이질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에 젖어있는 이들에게 정서적인 교감을 두기엔 나 자신이 너무 감정에 휘둘리고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막말로 저런 자아도취 핵폐기물들하고 내가 겸상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냐 으름장을 놓겠지만 그땐 내가 많이 어렸고 엄마의 세뇌를 통해 내가 내 판단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를 소위 여자 이재명이라고 하는데 자식 상대로도 입을 터는 이런 사람 밑에서 자라게 되면 애가 자기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게 된다. 이런 걸 가스 라이팅이라고도 하는데. 상대방이 너무나 큰 산 같고 청산유수하여 상대방을 잘 구워삶게 되면 나 자신은 내가 가진 판단력보다 상대방의 판단력이 더 나을 거란 생각에 빠지고 일종의 싸함을 느끼더라도 내 판단 자체를 유보한다. 내 생각에 에러가 있을 것이라는 걸 항상 전제로 깔고 간다.
그러기에 나도 대학 때는 그들이 옳고 나가 틀리다고 생각했고 나 자신에 대한 성격개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다. 허나 여유가 없는데 여유로운 척, 내 자신을 혐오하면서 잘난 척, 남의 비난이 무서운데 남의 의견이 대수롭지 않은 척, 나 자신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면서 나 자신에 취한 척- 소위 이런 자의식 과잉은 웬만한 엄청난 자기 최면 내지 병리적 자기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될 수 없었던 것도 자명한 거고 내가 그 속에 융화되는 거 자체도 틀린 거였던 거다.
어찌 보면 나는 태어나 자라면서 엄마가 갈망했으나 나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특정 부류의 일부분이 되려고 무던히 노력을 했었고 그럴 때마다 배신 또는 냉대 아니면 스스로 이질감을 느껴 튕겨져 나가기를 반복을 했던 거 같다. 이는 이후에 성당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왜 나는 내 주변에 미친놈들이 이렇게나 많았던 걸까.”라고 되뇌는 것도 솔직히 올해 들어서야 하기 시작한 푸념이다. 근데 그 푸념에 대한 해답을 결국 찾은 거다.
나 자신도 나르시시스트들처럼 미친놈이 되어야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을까라는 착각에 그들 중 일부분이 되어보려고 빗장을 다 열고 사람을 안 가리고 다 받아 버린 것. 맘에 안 들면서도 그중의 일부분이 되기 위해선 내선에서 어느 정도 손해보고 양보하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헛된 믿음 때문이었다. 정말 시간이 가면서 내가 하나하나 내치긴 했지만 내 주위 어느 하나 품고 갈만한 사람 하나 없더라. 그 오랜 시간을 그런 이들에게 싸여서 한평생을 시달리고도 내 본질에는 그렇게 큰 타격이 없었고 되리어 정신을 바짝 차려 나를 그리고 세상을 이제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건 그나마 참 행운이자 축복이라고 생각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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