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딸을 질투하는 건 비정상이라고 보편적으로 우린 다들 배우지만 그래도 할 사람은 하긴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내리사랑은 사회적 통념, 생물학적 법칙으로 하도 당연시되다 보니 교과서에서 조차 언급을 안 하죠.
그렇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질투심을 가진 부모를 두게 되면 자녀는 수년간을 그런 부모 아래서 인지부조화를 겪게 되죠. 저 같은 경우엔 중학교부터 십수 년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지속되어 왔습니다.
사회가 부모는 자녀의 성인이 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라 주입시키기도 했거니와 부모 본인도 철석같이 자식에게 그리한다고 믿어 의심을 하지 않죠.
하지만 이 보살핌을 받는 입장에서 자식은 뭔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궁핍한 처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초등학생 아이에게 하루 두 끼 이상을 라면만 끓여 준다거나, 양치질을 제대로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아이에게 왜 이빨 하나 제대로 못 닦냐며 닦달을 한다거나, 어려선 나 닮아서 글자도 빨리 깨우친다며 즐거워하더니 고학년 올라가서 성적이 안 늘면 아빠를 닮아서 그렇다며 말을 바꾸는 등.. 이런 상황과 모순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거예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상식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아주 상반되는 걸 마주했을 때 심리적으로 불쾌감을 느낍니다. 이걸 인지 부조화라고 하죠. 그리고 불쾌함을 접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리 사고는 이 불쾌감을 해소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모순적인 일이 발생했는지 스스로 이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끼워 맞추려고 하는 거죠.
사이비 단체에서 지구 종말론 날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멸망하지 않으면 신도들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닿아서 신이 그 노여움을 풀었구나.’라며 더 열렬히 기도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머릿속으로 끼워 맞춰버린 그 답이 정답일 가능성은 이런 상황에선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 모순을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알던 상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열어주는 거니까요.
질투가 병리적이 되려면 이러한 사회적 통념 속에서 개인이 소중히 지켜야 할 인연의 상대조차도 파괴해버릴 만큼의 강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그 질투를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행동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제일 흔합니다. 사회적 통념상 우리는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 이렇게 주거를 같이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줄 만한 유일한 버팀목들로 여기고 살아가는데 내 생존에 필수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깨부수는 건 말이 안 되죠. 하지만 의식을 전혀 못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애성 인격장애일 경우 말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인격장애들도 포함됩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들은 자기가 직접 산통을 겪고 낳은 자식이고 공을 들여 먹고 입히고 공부시키며 그 누구 보다도 좋은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건 사회가 심어준 엄마의 이상적인 이미지인데 이걸 아무런 필터링 없이 자기 자신과 동일시해버립니다. 자신의 객관적 평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임신을 한 직후부터 자신은 이 세상 최고의 엄마가 반드시 될 것이고 이게 안 될 경우 외부의 책임을 물을 뿐입니다. 난 이미 훌륭한 엄마의 노릇을 다 하고 있는데 애가 이상하고, 남편이 무능력하고 어린이집 선생들이 농땡이를 까는 거예요.
이렇게 세월이 흘러 아이가 성인이 되면 견딜 수 없이 회한과 공허함이 옵니다. 내 인생을 다 저 아이에 쏟아부어 허송세월 한 거 같고(보통 자기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애는 학원 뺑뺑이 돌리고 나중엔 집에 방치하면서 키운 경우가 대부분) 내가 입고 쓰고 즐길 거 다 남에게 몰빵한거 같은 억울함에 성인이 되어 자립을 하게 되면 내가 (자의적으로) 엄마가 되어 고생한 것들을 다 못 돌려받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도 오게 되죠. 그런데 또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은 세상 훌륭한 엄마이기도 하니까 자식에게는 평생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하겠냐니 이런 말을 하죠. 그러며 시집갈 때 밑천을 만들어야 하니 사리에 밝은 자신이 월급을 더 불려 줄 테니 엄마에게 맡기라며 자식의 재물을 볼모로 잡는 형국이 생깁니다.
상황의 팩트만 나열하면 이건 헌신적인 엄마와 자식 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엄마라면 다 헌신적이어야 한다 그러는 데다가 엄마 본인도 그렇게 말을 하니 딸이 인지부조화로 인한 혼란이 생길 수밖에요.
성인이 된 딸에게 엄마가 보이는 질투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연애를 시작한 젊은 여자로서의 딸에 대한 견제.
제가 자주 목격한 사례는 남자 친구를 동반한 식사자리에서 엄마가 딸에 대한 외모에 대한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왜 요즘 이렇게 식탐이 많아졌냐, 몸매 흐트러진 거 다 보인다. 역시 아빠를 닮아서 목이 짧은 거 같네. 이런 멘트에서 주목할 점은 그냥 딸이 마냥 부러운 게 아니라 딸의 흠을 잡아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입니다. 성경험을 했다는 얘기를 하게 될 경우 엄마는 자신이 만난 대물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기도 합니다. 자기도 질 수는 없다는 의미로 보편적으로 해석합니다.
2. 엄마가 된 딸에 대한 견제.
딸이 자식을 낳고 ‘어진 어머니’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 또한 탐탁지 않습니다. 저희 외할머니 같은 경우 손녀인 저에겐 그렇게 살갑게 대하지 않으시면서도 유난히 선물공세를 하셨는데 엄마는 어려서부터 엄마로부터 유령인간 취급받았던 본인의 모습과 선물을 받고 좋아라 하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이 될 수밖에 없죠. 외할머니는 이외에도 자식인 엄마에게 전기 수돗물 낭비를 다 큰 어른이 왜 하냐면서 엄마를 앞에 두고 장 보면서도 한두 푼 아끼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매번 과시하셨습니다.
3. 여자로서 딸에 대한 견제.
이건 1번과는 달리 아주 위험한 부류인데요. 실제로 엄마들이 딸의 교제 상대를 유혹하는 듯한 뉘앙스의 행동들을 합니다. 특히 영국 같은 곳에선 흔하게 리얼리티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타블로이드지에서도 자주 나옵니다. 제가 유튜브 구독하는 나르시시즘 학대를 극복한 라이프 코치분은 자신의 엄마를 집에 초대하자 샤워를 하겠다며 샤워를 한 후 수건을 대충 몸에 두르고선 사위가 쉬고 있는 안방(문이 살짝 열려있었다고) 문 앞을 이리저리 서성 거리는 것을 목격한 것에 대해서 에피소드를 낸 적이 있죠.
4. 사회성이나 지식을 키우려는 자식에 대한 견제.
이는 부모가 자신이 못 누려본 교육 혜택 같은 것을 자녀가 받음으로써 본인이 받는 상대적 박탈감, 머리가 큰 자녀의 독립으로 인해 자신을 우러러 봐줄 사람이 없어질 꺼란 두려움, 교육에 들어가는 돈을 왜 자신에게 써야지 자녀에게 양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억울함 이런 감정들이 다 섞여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녀가 마냥 자기 눈치 잘 보면서 엄마를 우러러 봐주길 바라는 마음 또한 자신의 밑 빠진 독 같은 자존감을 채워 주는 수단으로 자신의 자녀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저러면 안 된다고 배우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순간 당신은 인간관계에 의한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의도가 정확하던 아니든 간에 그 상황을 그 상황 그대로 따로 놓고 보는 것이 나에게 가해지는 학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CPTSD 회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돌림이 사춘기 학생의 가치관에 미치는 영향 2 (1) | 2020.12.04 |
---|---|
따돌림이 사춘기 학생의 가치관에 미치는 영향 1 (0) | 2020.12.01 |
복합외상 자가 진단 키트 - CPTSD Questionnaire (0) | 2020.11.27 |
나르시시스트가 자녀에게 하는 학대 (0) | 2020.11.27 |
삶의 의미 (0) | 2020.11.27 |
내가 살면서 겪었던 고통은 다 사람들에 의해 생긴거라고 봐도 무관하다 본다. (0) | 2020.11.27 |
완벽한 유령 - 회복중 인간관계의 변화 (0) | 2020.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