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TSD 회복

부부싸움이 아이에게 남긴 상처 - 해리/비현실감

Rambling on & about 2021. 3. 19. 13:46

상담을 하면서 아이였던 시절로 되돌아가서 그 시절 집안에서 구출되어 새로운 가정에서 보살핌 받는 시나리오를 구상해나갔다. 이를 재양육과정이라고 하겠다.

 

아무리 하루아침에 구출이 되어 좋은 사람 아래 보살핌을 받는 그런 동화 속 이야기가 전개된다 치자. 현실적으로 과거의 상처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아이는 새 보호자와 새 환경이 낯설기만 할 것이고 지긋했지만 그래도 부모라고 믿고 살던 부모에 대한 죄책감과 연민, 설령 이들이 나를 다시 구렁텅이로 끌고 가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등 그런 복잡한 감정들에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이 복잡한 감정은 성인이 되어 집에서 뛰쳐나왔을 때도 다를 게 없다지만 아마도 어려서부터 나와 내 부모 사이에 수십 년간 뒤틀린 채로 자라난 이 독과 같은 공생관계는 그 시작점인 유년기 시절로 돌아가 청산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 받은 상처로 인해 계속되는 플래시백, 해리 증상, 감정의 순환 불통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탓이다. 

 

과거의 공포스러웠던 기억을 또렷히 재생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이 과정에서 항상 두고 온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하늘에서 천둥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떨리고 눈앞이 하얘지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하도 강력해서 떠올리는 거 자체가 엄청난 곤혹이었고 이 상태로 계속 재양육 시나리오를 이어갈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었다. 지푸라기라도 집고 싶은 마음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상징들을 다 총동원했다. 

 

"그 시절 어린 나는 엄마를 전지전능한 신으로 착각을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녀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크나큰 형벌을 받을 것이란 그런 죄책감에 엄마를 떠나는 상상을 하면 극한의 공포를 느꼈던 건 아닐까."

 

한 2주를 떠올려 봤지만 그렇게 맘에 와닿는 답은 아니었다. 엄마는 나를 단 한 번의 손짓 하나로 죽일 만큼 위협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었고 신체적인 부분에서도 그런 면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담을 하면서 재양육되는 어린 내가 내뱉은 말은 뭘까.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해요? 엄마는 나없이 위험한데...."

 

어린 나는 나 없는 엄마가 위험하다고 느꼈을까? 마흔을 앞둔 성인 여성이 뭔 위협을 당할 거라고? 

아. 

엄마는 나 없이 아빠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구나.

그대로 부부싸움을 할 엄마가 걱정되었던거다.

그렇다고 해서 부부싸움에서 엄마의 모습이 나에게 위협적이라서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온몸이 떨렸을까?

그건 또 아니었다. 

 

일은 손에 안 잡히고 머릿속은 안개낀 상태로 영 돌아가지 않아 그 실마리를 잡고 싶은 마음에 이 문제 하나 해결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부부 싸움할 때마다 내 부모는 서로 어느 말을 주고받으며 어떻게 그걸 싸움으로 연결 짓는지, 하나의 스텝마다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 상황에서 나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어렸던 나는 그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하나씩 다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 이미지를 떠올리는게 쉽지 않았다. 떠올리려고 하면 머릿속에서 그걸 뒤덮으려 다른 걱정거리 하나를 만들어 내고 (그때 당시 내 피부와 주름이 불만이었는데 그것에 대한 걱정이 다시금 올라와 미친 듯이 화장품을 넷상에서 뒤져보고) 또 떠올리려고 하면 집에 쌓인 빨랫감이 생각나서 그걸 처리하는 상상... 이렇게 내 머리는 그때 그 기억을 재생하지 않으려고 엄청난 방어를 했다. 책상에 앉아서 손바닥 만한 수첩, 그것도 띄엄띄엄 채우는데 적어도 4-5시간은 걸린 거 같다. 

 

부부싸움의 패턴

 

하지만 다 채우고 나니 그 답은 의외로 너무 다른 곳에 있었다.

부부 싸움마다 보았던 아빠의 과격한 언행과 폭력적인 태도의 잔상이 극한의 공포로 다가왔던 것이다.

 

보통 대화의 패턴은 이랬다.

 

엄마는 아빠의 일정하지 않은 수입이라던지,

아빠가 놀면서 자신의 돈에 손을 댔다는 의심 이런 것으로

아빠를 코너에 몰아세운다.

아빠는 말주변이 없기에 이걸 되받아치지 못하고

계속되는 엄마의 총공세에 한없이 자신이 작아지는 걸 느낀다.

그리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는 생각에

물리적으로 반격을 하게 된다.

이제 서로의 대화의 본질은 흐려지고 싸움이 클라이맥스로 치닿는다. 

아빠는 '어차피 언젠가 다 죽는 거 여기서 다 엎어버리자.',

'시 x, 너 같은 x 이랑 사는 거 진절머리 난다.' 등등

핏대를 세우면서 엄마에 대한 인신공격은 물론

모두 다 죽으면 끝이 난다는 그런 암시의 말들을 자주 했다.

아빠의 얼굴을 붉어지고 눈빛에서도 광기가 돌기 시작하는데

이러면서 집안이나 가게에 있던 물건들을 던지고 깨부수기 시작한다.

엄마 또한 그 죽음에 동의하는 말들을 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렇게 흔하지 않다.

'그래, 다 죽으면 되겠네.'

보통 아빠가 분노 표출을 할 때 그걸 중재한다기 보단

본인이 더 크게 소리를 내면서 우는 걸로 어떻게든

그 싸움에서 본전을 건지려고 노력한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일차적인 장치이다. 

이렇게 상황이 극한으로 치닿을 쯤엔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 oo야, 엄마 죽는다. 엄마 이제 어떻게 하니.'

이런 식으로 애먼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빠로 인해 죄책감을 더 느끼게 하려는 장치이다. 

 

아빠는 자신이 할 변명이나 설명들이 바닥났을 때 소위 '다 뒤집어엎어서' 판을 장악하려는 그런 방법으로 항상 싸워 왔는데 이 과정에서 물리적인 반격이 많이 들어갔다. 표정이 일그러지고, 눈빛의 초점이 아예 나가버리는 점, 목소리가 과하게 높아지고, 딸리는 어휘력 대신 괴성이나 쌍욕을 더 많이 쓰게 되고 급기야 다 끝내 버리자며 종말을 언급하고, 때리는 척 팔을 올리는 시늉을 하고, 집기를 부수고 멀리 던지는 등. 디테일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이걸 다 조합을 하면 마누라 상대로 싸움에서 승리를 하고 싶어 극단적인 것까지 본인이 쓸 수 있는 건 다 총동원한 거라 볼 수 있다. 이런 싸움을 정말 2-3주에 한 번꼴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조그마한 소품만 항상 망가졌었다. 아빠가 원했던 건 그저 엄마를 이겨먹는 거라는 걸 나이가 든 이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부모 둘 다 이 싸움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일언반구 없이 그냥 아무 일 없듯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들한테는 이런 싸움이 그저 티격태격하는 일상생활로 자리 잡은 거 같았다. 

 

감정적 미성숙함이란

 

내 부모는 둘 다 감정적으로 미성숙했고 이 미성숙함으로 비롯한 싸움이 가장 많이 일어났다고 본다.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싸움이 생기는 경우는 너무나 드물었기 때문이다. 싸움만 놓고 봤을 때 그들의 미성숙한 점들은 대략 이렇게 간추릴 수 있다.  

  • 자신에 대한 어떤 피드백을 듣든 간에 이걸 나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반응을 했다.
  • 그 감정이 표출되기 시작하면 이성을 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본인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결여가 되어 있다.
  • 본인이 일으킨 상황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고 항상 남에게 전가한다. 
  • 주기적으로 약점을 잡고 공격을 해서 관계에서의 주도권을 차지하고 확인하려고 한다. 
  • 엄마 같은 경우엔 망상장애를 의심케 하는 모습이 있었다. 직계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까지 다 도둑으로 몰아세워서 관계를 무수히 파탄 낸 전력이 있다. 

 

종말에 대한 공포

 

싸우는 본인들도 자기들이 왜 쌍스러운 욕을 하면서 오늘이라도 다 죽을 것 같이 싸우는지 알 턱이 없으니 나에게 무슨 설명을 해줄 수 있을 것이며 무슨 변명이 납득이 갔을까? 온전한 성인들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나에게도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 그냥 그렇게 덮어두고 넘어갔다. 

 

그 시절 나는 싸움에서 보이는 행위나 말들을 정말 곧이곧대로 믿었다. 싸움이 나는 날은 온 가족이 다 순간에 종말을 맞이 할 수도 있는 날이었다. 둘 다 그렇게 본인들 삶의 종말을, 내 삶의 종말을 수도 없이 얘기했거든. 죽기 싫은 마음뿐이었지만 내 삶의 시작과 끝 모두 다 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분노로 인해 나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는 개미 목숨이었을 뿐. 그래서 이 삶이 진짜 내 삶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릴 적 자주 하던 상상이 이 집안은 내가 잠시 맡겨져 있는 그런 임시보호 격의 곳이고 언젠가는 내 진짜 부모가 나를 데리고 갈 거란 생각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을 극구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나중에 이야기할 해리로 이어진 거 아닌가 싶다. 

 

여기서 죽음 대신 종말이란 단어를 쓰는 이유는 그들이 싸우면서 뭉뚱그려 '끝', '엎어버리자', '사라져 버리자'라는 은유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어떻게 죽을 건지 구체화한 적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죽음이란 얘기를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거 자체가 섬뜩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이미 그들 직계 가족 내에서 자살, 병사 같은 것들이 수두룩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삶에 대한 협박은 그 불분명함 때문에 내가 겪는 공포를 극대화하였다. 

 

그리고 엄마는 항상 싸움은 본인이 시작해놓고 5살인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내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엄마가 왜 서른 후반의 나이에 지 자식 앞에서 애 행세를 한 건지 더더욱 납득이 안 된다. 이들이 감정적 면에서 유아기 때로 다시 퇴행을 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이런 추접에 가까운 행태를 받아줄 일은 이제 없을 거 같다. 

 

그래도 엄마니까 거역할 수 없었다. 가족 없이는 죽음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빠라는 거대한 성인 남자 상대로 고작 5살 어린 나이에 성인인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요구라서 그런 걸 떠맡은 거 자체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보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보호자랑 싸워야 한다는 아이러니라니? 빠져나가고 싶단 생각이 너무 간절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에게 있어 아빠란 존재는 언젠가는 크게 폭발할 활화산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종말의 시간은 알 수 없었고, 매번 자그마한 폭발을 할 때마다 마음 졸이며 이번은 큰 폭발이 아니길 고대했다. 되리어 그 맘 졸이던 그 시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상황을 맞이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까마득해지고. 엄마 아빠가 안 싸우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날, 고작 이런 걸 감사하고 기대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이런 걸 행복이라고 하는 건가? 란 의구심에 혼란스러웠다.  

 

해리

 

이미 어렸을 적 교통사고도 당하고 성추행도 당하는 바람에 해리를 수어 번 겪었고 게다가 이런 싸움에 수도 없이 노출되다 보니 그 해리가 자주 소환되어 아예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정신적 고통을 받거나 아이처럼 마음의 내성이 낮을 때, 한계를 넘는 고통이나 감정을 유체이탈 체험이나 기억상실이라는 형태로 분리하여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것도 인간의 방어본능이다. 장애 범주가 아닌 것에서 해리를 논할 때 이인(離人) 증을 자주 이야기하는데 두 가지 종류가 있다.

  • 하나는 Depersonalisation으로 정신이 육체에서 이탈해서 마치 천장에서 내 몸을 내려다보는 그런 인상을 받거나
  • 두 번째는 Derealisation으로 나 자신은 온전한데 내 주변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인상을 받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파고들고 보니 내가 과거에 겪었던 공황 발작들은 증상면에서 봤을 때 결국 어린 시절의 이인 증상이 다시 올라온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나 싶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두 번째 Derealisation/비현실감 증상을 자주 경험했는데 이는 내 육체가 마치 시공간이 멈춘 그런 진공상태에 있고 내 눈앞에 있는 배경 속 다른 사람들은 보통보다 빠른 배속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 것이다. 이런 증상이 오게 되면 매일 만지고 사용하는 사물들이 갑자기 이질적이게 느껴지고 내 주변 배경이 어디서부턴가 다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에 압도당한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데 던져져 있는 느낌이랄까. 

 

싸움이 시작되면 아빠 말처럼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는게 너무 확실한데 싸움이 끝나면 아무일 없었던 듯 무마가 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성인인 아빠를 상대로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오로지 살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데서 오는 억울함 그리고 중압감 이것 만으로도 어린아이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스트레스이자 고통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나 자신을 분리하고 싶었던 욕구가 너무 강했다.

 

내 집안, 주변 환경 이런 것들을 온전히 내 것임을 받아들인다는 건 앞서 말한 어린 몸으로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 이유도 없이 죽음을 매번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 또한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내 삶을 내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 내가 덮고 있는 이불 또한 현실이 아니다는 상상을 하면서 살아와야 했다. 나는 부부 싸움을 보고 있는 이 상황 (이는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뜻한다)에 전혀 존재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뜨면 더 나은 현실로 이동하지 않을까란 맘이 결국엔 그런 해리로 이어졌고 이는 생각보다 장기적으로 내 삶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